만물이 피어나는 초봄 무렵에, 춘곤증을 이기지 못한 황제가 하품을 했다.
졸린듯이 눈을 비비는 황제 앞에서, 문부백관들의 안색은 까맣게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어전 회의장의 상석 부근에 앉아있던 재무대신 겸 '납세거부를 위한 고위귀족 협의회'의 수장 아르타곤 후작은 어전회의 때마다 자꾸만 사라져가는 귀족층의 특권을 생각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엄숙한 어전회의 중에 한숨이 간절했지만, 어느 누구도 황제 앞에서 하품을 할 수 없다는 황명 제19928조에 의해 그 권리가 박탈당한 참이었다.
아르타곤 후작은 하는 수 없이 정신을 집중해 오늘 처리된 안건을 다시 훑어보았다.
이번 어전회의의 결과로 '귀족층의 권리신장을 위한 법률'은 '귀족 및 그 하위관료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한 인도적 협의'로 대체되었고, 그나마 제국공신들이 그 초안을 만들어 약 1300년 간 전해 내려오던 '고위귀족 특별보호법'은 '무궁한 제국번영의 기초가 되는 제국민대선서'의 취지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전격 폐지되었다. 이렇게 막나가는 황제의 행보에 제동을 걸어줄 그 누군가가 없다는 사실이 고위 귀족 모두에게는 암담하면서도 의아하게 느껴졌다.
호색한이었던 전 황제의 막내아들인 제 18황자로 태어나 정쟁은 커녕 선대 황제에게 아침 문안 조차 하지 못했던 현 황제인데,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진갈색 거대 드래곤에 의해 현 황제를 제외한 황가 전원이 실종되어버리면서 어부지리격으로 보위를 차지하게 된 지금의 황제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몇 개월 만에 고위 귀족들의 특권을 한 움쿰씩 떼어 황제 자신의 호주머니에 구겨 넣고 있는 상황이었다. 선대 황제 밑에서 신권의 최정점을 차지해 권력의 균형을 맞춰냈던 아르타곤 후작으로선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이 상태로는 신권의 강화는 커녕 황권과 신권의 균형이 깨어지는 것 조차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맹렬히 휘젓고 다녔다. 더구나 황제의 측근에게 붙여놓은 첩자로부터 황제가 작위 세습제를 폐지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라는 사실을 알고난 이후에 아르타곤 후작의 속옷은 언제나 마법처리가 된 두터운 재질임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흠. 대충 이번 회의의 안건이 모두 처리된 듯 보이니 이만 공식적인 어전회의를 마치도록 하겠소."
회의석상에서 일어나며 황제의 늘어지는 하품을 바라보던 대신들은 떫은 표정으로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에헴. 깜둥이, 깜둥이 게 있느냐!"
잔뜩 과장된 위엄을 뽐내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황제는 누군가를 찾아왔던 본래의 목적은 잊고 목소리 연습에 열중했다.
언제나 그렇게 30분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자 갑작스레 분노가 솟구친 황제는 어둠에 휩싸인 황궁 서쪽 별관의 지하실로 통하는 문을 걷어찼다.
"야이 깜둥이 새꺄! 지금 당장 안 나오면, 네 쓸 데 없는 불알을 꼬챙이에 찔러 구워먹을 테다!"
"뭐? 흰둥이가 100m 달리기에서 세계신기록 세우는 헛소리를 하는 네 새끼는 누구냐!"
"니 에비다."
지하실 문 너머로 잠깐의 정적이 깔렸다.
"저것도 황제라고… 으이그!"
문이 열리며, 온몸을 흑의로 덮은 듯한 느낌의 사내가 불만을 토로했다.
"꼬우면 네가 황제하세요?"
황제는 특유의 거만한 태도를 유지하며 지하실 너머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어떠한 빛조차 침범하지 못할 어둠속에서, 황제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도중에 어둠에 녹아든 사내의 불만이 이어졌지만, 황제는 그것을 무시하고 귀를 막거나, 제국군의 군가를 부르며 애써 무시했다.
"야, 황제. 부탁한 거 도착했으니 먼저 가봐. 난 밀린 주문 좀 처리하고 뒤따라 가겠다."
"허허허허. 내 자네를 극진히 아끼는 것 잊지 말게나. 허허허허허허허"
목적지를 향해 전력으로 뛰어가며 소리친 황제의 목소리가 황궁 지하실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변함없이 어둠에 녹아들어 있던 사내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무엇인가를 읽고 있는 황제는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며 온몸을 주체하지 못했다. 도중에 손에 힘을 주며 읽고 있는 문서를 찢을 것을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입으로 갖은 욕설을 풀어내며 문서를 끝까지 읽어냈다. 눈의 흰자위가 시뻘겋게 달아오를 만큼 황제는 깊은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작은 방 정도의 크기로 만들어진 석실을 배회하던 황제는, 일을 마치고 들어온 일전의 사내 앞에서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
"자기 똥에서 기생충을 뽑아 전시해 놓을 놈들 같으니! 감히 황제의 명을 거역해? 우워어 참을 수가 없구나! 깜둥아, 제반상황 읊어보아라!"
"육시럴. 더 설명할 것도 없다. 네가 나서서 귀족들보고 세금 내라고 안 그랬냐. 그러니 그놈들도 나름 뭉친거지. 왜 그 요즘 바지에 매일같이 오줌 찌리는 놈 있잖냐. 재무장관 아르타곤인가? 아무튼 그 작자가 '납세거부를 위한 고위귀족 협의회'인가 개불알인가 하는 걸 만들어서 단체행동 한다고 투덜댄다는 말이다. 가뜩이나 오늘 어전회의에서 귀족들 방패막이를 뜯어내 버렸으니 불안 안 했겠냐?"
흑빛 로브로 온몸을 감싼 사내가 억지로 옷을 벗어내며 말했다. 드러난 몸매는 분명 온몸이 까맣고 탄탄하다 알려진 흑인종의 것이었다.
"좋다, 블랙잭군. 내 아르타곤 만큼은 남자의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건들지 않았는데, 이젠 못 참겠다. 그 요실금 환자자식 홍콩으로 보내버려!"
"명을 받들도록 하지. 마침 잘 됐군, 우리 아가들도 그 놈 찌린내 만큼은 못 참겠다더라. "
흑인종, 블랙잭은 그렇게 또 다시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물론 후에 있을 아르타콘의 숙청 순간을 그리며 홀로 그 즐거움에 젖어 있는 황제를 제외하고서.
그 다음날 이어진 어전회의의 주요 안건은 '아르타곤 사형동의안'으로 결정되었으며, 황제는 회의 시작부터 끝까지 시녀들의 정성스러운 안마를 받으며 귀족회의 만장일치 동의를 얻어 그 자리에서 바로 법무대신에게 아르타곤의 사형집행을 명했다.
이제껏 부정한 행위로 인해 목을 내놓은 귀족들은 부지기수였지만, 이번 형 집행의 대상이 된 부재상 겸 재무대신 아르타곤 정도의 고위귀족에게 24시간 내 사형결정이 내려진 것은 제국 역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물론 그 부정한 행위가 '황녀간음죄' 였지만, 지금의 황녀를 간음했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한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납득할 수 없는 처사임에 분명했다. 어찌 이제 돌이 갓 지난 황녀에게 욕정을 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황권은 강철로 쌓아올린 주신 '아이론네팬체'의 팬티, 아니 신전 만큼이나 공고하고 강대한 지라, 누구도 황제의 발목을 잡지 못했다.
이렇게 제 255회 어전회의는 또 한번의 피바람을 불러 일으키며 끝났다.
제국 유일의 흑인종, 블랙잭은 오랜만에 맞이하는 여유에 좀이 쑤셔 피가 철철 흐를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아무 이유 없이 볕이 좋아 밖에 나왔지만, 황제의 밤노동 만큼이나 짧은 시간이 지나자 곧바로 후회가 밀려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백성들은 블랙잭이 나타나자 마치 질 좋은 드래곤 가죽을 우연히 봤다는 듯 황급히 자리를 피했고, 누가 불렀는지 심지어 주신 '아이론네팬체'에서 순찰나온 파견신관이 블랙잭의 시야가 미치지 않는 곳에서 그를 향해 마성 중화기도를 드리기까지 했다.
입장이 난처해진 블랙잭은 결국 비장의 한 수를 꺼내들었다.
『"지옥보다 뜨거운 홍콩 홍등가의 신체온도와, 까마디 까만 이 세번째 다리가 나의 자취를 감춰줄 것이다. '헤이 니그로!'"』
낮이 밤으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나면서, 이후에 그 누구도 블랙잭을 찾지 못했다.
"끌끌끌끌끌 세계 최고 흑인종에 쏠린 열렬한 관심에 몸둘 바를 모르겠느냐?"
황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블랙잭의 갑작스런 방문에도 놀라지 않고, 같잖은 위로의 한 마디를 건넸다.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찌됐건 네 은신능력 만큼은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지 않았느냐. 수고했다."
"닥쳐라! 아무렴 누구씨의 '보이지 않는 세번째 다리' 보다 더 할까. 내 아가들을 풀면 그 소문 쯤이야 네 밤노동 한 번 끝낼 시간이면…"
황제는 무릎을 꿇었다.
갓 떠오른 샛별이 노을가운데 빛날 즈음, 제 3 공작성의 대연회장은 무수한 여인들의 행렬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여인들의 시중을 위해 준비된 하인들을 제외하면 그 어디에서도 남자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공작 전하의 연회 초대장을 받지 못하신 분들은 2층으로 올라가 주십시오!"
안내를 위한 목소리는 이미 묻혀버린 지 오래였고, 그 이유로 제국 내에서도 손꼽힐 만한 미인들만이 초대된 연회의 사전 준비는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번 연회를 주최한 자는 새 황제의 즉위와 동시에 큰 공을 세워 단 한 번에 공작 작위를 받은 글렌더스 공작이었다.
그가 현 황제의 즉위에 있어서 모든 정적을 보내버린 0등 공신이라는 것과, 라키온산맥을 끼고 끊임없이 게릴라전을 펼치던 4천 년 묵은 블랙 드래곤 '쉬파롬두르'를 맨손으로 때려잡은 것을 이유로 공작이 된 것은 대외적으로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그것 이외에는 나름 확실한 정보통을 보유한 귀족들 마저도 그에 대한 것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마침 글렌더스 공작이 각 귀족가의 영애들만을 초청하는 연회를 열었고, 귀족들은 초대함에 있어 절차가 잘못된 점과 귀족가의 영애만을 위한 연회였기에 글렌더스 공작에게 잔뜩 불만을 품었지만, 새황제의 각별한 총애를 받는 것임이 확실시 되는 인물에게 밉상을 보이긴 싫었는지 조건 없이 연회참가를 허락했다.
한편, 연회장에선 몇몇 하인들이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며 한 남자에게 쉴 새 없이 연회 준비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
"공작 전하께 보고드립니다. 현재까지 987분 도착하셨습니다. 수용가능 인원까지는 앞으로 1500 명 정도 남았습니다만, 이후에도 계속 입장을 허가하실 생각이십니까?"
"아직 모자라다 안 했나! 내 황제와 친히 약조한 바가 있단 말이다. 미인삼분지계의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는 것. 내 말 알겠나?"
말없이 부복하고 다시금 자신의 자리를 찾아 가는 하인을 보며, 글렌더스 공작은 이후에 있을 연회에 대한 기대치를 높이고 있었다. 고르고 골라 초청한 귀족가 여인들인 만큼, 자신의 입맞에 맞을 것이란 확신을 품고있는 글렌더스 공작이었다.
샹들리에가 불을 밝히며, 화려하게 장식된 연회장 내부를 화려한 빛으로 감싸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아직은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여인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빛이 들어오지 않아 어두웠던 연회장 내부가 밝아지자, 이번 연회의 주최자인 글렌더스 공작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레드 와인을 조금 머금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연회장 앞으로 한걸음 나아갔다.
"환영합니다! 숙녀 여러분. 제가 보낸 한장의 초대장에도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달려와 주신 것 감사드리며, 부득이하게 초대장을 못 받고 찾아와 주신 분들에게도 최대한의 답례로 이번 연회를 성대하게…"
꺄아아아아아아!
대지를 울리는 엄청난 진동과 함께 연회장의 천장이 무너지며 한 여인이 연회장의 중앙으로 추락해 버렸다.
갑작스러운 혼란으로 인해 질서유지가 되지 않아 당황한 일부 여인들이 연회장 밖으로 서둘러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입구는 좁고, 나가려는 사람이 많은 탓에 자칫 잘못했다간 그 귀한 귀족가의 영애들이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일반적으로 연회장의 안전을 위해 파견되는 기사단을 글렌더스가 외성으로 물렸기에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
충격적인 천장붕괴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 바닥으로 추락했던 여인이 조심스레 빠져나왔다. 글렌더스는 다 글렀다는 생각을 했다.
"앗. 죄송합니다! 이 문제는 장본인인 제가 해결할게요. 그냥 출입구를 넓혀 놓으면 되겠죠? 흠. 이야아아아아!"
글렌더스와 여인의 눈이 마주쳤고, 여인은 함성을 내지르며 생긋 웃었다.
분명 수십 미터 높이에서 무방비 상태로 추락했을 텐데, 여인은 아무런 충격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그것에 잠시 감격한 글렌더스 공작은 그 여인의 마지막 기합소리의 의미를 깨달아 버렸다.
"야! 너 너 너 뭐하는 짓이야! 스톱! 자 잠깐…"
안타깝게도 글렌더스 공작의 신음과도 같은 마지막 비명은 늦어버렸다. 결국 난동의 주범인 한 여인의 일격으로 대연회장 자체가 무너질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악! 내가 어떻게 마련한 자린데… 황제 이자식, 이것도 다 네가 꾸민 짓이지!"
글렌더스는 대연회장을 무너뜨릴뻔한 문제의 여인을 찾아 내달리며 말했다.
"방금 들어온 소식이다. 글렌더스의 제 3 공작성의 연회장이 붕괴될 위기에 처했다는군. "
"미친놈. 그자리에서 단체 성인식이라도 치뤄줬나 보지?"
흑인종, 블랙잭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매우 심각하다. 황제 너도 글렌더스가 오늘 귀족가 영애들을 연회에 초대한 걸 알고 있을 텐데?"
"뭬 뭬야?"
"또 있다. 네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체납 관련 보고다."
언제 어디서나 차분한 블랙잭 답게, 이번에는 다른 중요한 사건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최악의 체납상황이다. 대상은 말하는 파충류들. 납세대상에 포함되고 나서도 한 번 도 세금을 내지 않은 상태다.
"이런 버러지같은! 세금추징 대상이 되는 그 도마뱀 종족, 체납액, 그동안 이자 붙은 연체액까지 싸그리 모아서 보고해. 기왕이면 그 파충류들이 어느 지역에서 사는지까지 알아오도록. 지들이 뭔데 제국민의 신성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겠다는 것이야!"
황제의 성난 표정을 보며 블랙잭은 그저 웃었다.
글렌더스는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일찍이 자신의 생애에서 어떤 '암컷'에게라도 분노를 표출하리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 했었던 그였고, 누구든지 '암컷'이 자신에게 어떠한 해를 입혔다면 모두 용서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었지만, 지금 한 '암컷'을 대상으로 온몸에 뻗치는 살기는 그의 다짐을 깨뜨릴 정도록 강력한 것이었다.
"크으으. 암컷. 암컷. 암컷! 내 원대한 야망을 송두리째 수포로 돌아가게 만든 너에게 복수하겠다."
4천 년 묵은 고룡 '쉬파롬두르'를 맨손으로 때려잡은 글렌더스 답게, 그 살기조차 유형의 기운을 이루었지만, 앞의 '암컷'은 자신이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는지 조차 모르는 듯 보였다.
"암컷! 어디 말해보거라. 내 '암컷'만은 개미핥기라도 아끼고 사랑하기로 약조했기에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이번 한 번 만은 용서해 주겠다. 그러나 정당한 이유가 없었다면…"
기세등등한 글렌더스의 앞에서 무릎을 옆으로 모아 편히 앉아있던 그 '암컷'은 방긋 웃어주며 말했다.
"아… 정말 죄송해요. 차원이동중에 잘못 떨어져 버려서 그만… 엉뚱한 곳으로 와버렸네요."
"뭐라고?"
글렌더스의 화가 조금 풀렸다고 생각했는지, 이내 '암컷'이 일어나 몸소 어떤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다.
"음. 방망이 길이가… 이 정도였어요. 나무로 만들어 진 것 같았는데, 이걸 휘둘러서 빠르게 날아오는 공을 맞췄던 것 같았어요."
글렌더스는 섬뜩함에 몸을 떨었다. 이유는 다름 아니라, 힘이나 조금 센 바보라고 생각했던 이 암컷이 알 수 없는 몽둥이를 봤다며 그것을 묘사하는데, 갑자기 암컷이 묘사하고 있던 것과 같은 빛을 발하는 몽둥이를 쥐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처음보는 요상한 모습으로 방망이를 휘둘렀다.
"자 잠깐. 암컷, 왜 갑자기 방망이 얘기가 나오는 것이냐. 그리고 차원이동을 대체 왜..."
'암컷'은 글렌더스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고개를 잠시 갸웃거리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전 암컷이 아니라 루넬리아에요. 흠… 피부가 새까만 흑인종들이 많이 보였고, 몸이 굉장히 탄탄하던걸요. 왠지 반할 것만 같네요. 그리고… 에이 됐다. 나중에 다시 설명드릴게요. 지금은 바빠서 더 설명드리기 힘들겠네요. 다음에 다시 만나요 오빠~"
홀연히 자신의 이름을 '루넬리아' 라고 밝힌 암컷은, 천하의 글렌더스 앞을 그냥 지나쳐 어딘가를 향해 붕 날아가버렸다.
가만히 눈을 감으며 루넬리아라는 암컷의 마지막 인사를 음미하던 글렌더스는 나직한 목소리로 새빨간 머리가 인상적인 시녀에게 명령했다.
"루넬리아라… 내 딸아, 뭐하는 암컷인지 알아봐 다오."
어느새 하늘을 찌를 듯 하던 글렌더스의 분노는 가라앉아 있었다.
매일같이 어전회의가 열리는 제국 대회의실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글렌더스는 조용히 황제가 앉는 상석의 뒷자리로 다가갔다. 황제가 그 좋아하는 어전회의를 팽개치고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아직 몰랐기에 그는 내심 불안했다.
"왔구나."
재무부의 말단직 자리에서 황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을 보고 글렌더스는 황제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글렌더스는 느긋한 걸음으로 황제의 옆자리에 가 앉았다.
"공작성에서의 일로 제국여인삼분지계를 깨자고 하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그 문제는 아니었나 보군. 왜, 혹시 세수 확보에 문제라도 생겼나?"
"칫. 주제에 맞게 노는구만."
글렌더스는 지금의 황제로부터 어떠한 힘도, 조롱도, 비난도 느낄 수 없었다. 황제는 계속해서 입을 달싹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우울해 보이기까지 하는 황제를 보며, 글렌더스는 한숨을 쉬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네가 있는 곳이면 언제 어디서나 느껴지던 깜둥이 놈의 기운이 이곳에서 만큼은 느껴지지 않는군. 오랜만에 도망치고 싶었던 거냐."
대회의실의 천장에서 빛이 쏘아져 내려왔다. 정오가 된 황궁의 대회의실은 눈부시게 환했지만 황제가 앉은 자리는 그늘에 가려 여전히 어두웠다.
"그래. 한 번 쯤은 쉬고 싶었어. 추운 겨울부터 따스한 봄까지… 줄곧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서 땀을 닦아내고 싶었지. 내가 너와 같을 수는 없잖아?"
"육체도, 정신도 서로를 속박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그렇겠군. 하지만 나도 그것 뿐이야. 너처럼 땀을 닦아내야만 하는 가면은 필요없지만, 마음속은 충분히 괴롭지. 내게는 오히려 네가 내 정신적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끝없는 절망속에서 머리를 움켜쥐며 살며시 짓는 실소. 글렌더스는 지금, 이곳의 황제에게서 그런 모습을 떠올렸다. 손으로 얼굴을 가린 황제는 입모양으론 웃는 것처럼 보였다.
"차라리 내가 누구인지도 모를 만큼 미쳐버리면 더 편할 것 같아."
황제는 말을 마치며, 앞의 책상을 짚고 일어났다.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눈은 초점을 잃은 상태였다.
"그래도 대책은 세워야겠지…"
다음날 열린 어전회의는 단 하나의 안건을 처리하고 끝이 났다. 안정적인 세수 확보를 위한 위원회의 창설이 그것이었다. 귀족들 입장에서야 살떨리는 것이었으나, 그것을 드러냄은 곧 죽음이었기에 회의 내내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30분도 채 되지 않아 어전회의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모든 귀족들이 빠져나갔지만, 글렌더스 공작만은 황제와 함께 자리에 남아있었다.
"그래, 글렌더스 공작. 위원회 창설 안건의 효력은 귀족들의 동의 후 곧바로 발휘되니 지금 당장 결성하는 것이 어떠한가?"
"흥! 황제 너 남의 말 뺏어 쓰지 마라. 흑인종아, 나와서 위원들 불러모아라."
미약한 어둠의 다크에 의지해 몸을 숨기고 있던 블랙잭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대회의실 내부에 강렬한 어둠의 기운이 돌았다.
『위원들, 당장 튀어와!』
강렬한 다크포스가 잦아들며 대회의실의 좌석에 차례차례 위원들이 앉은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허허. 우리까지 전부 다 해서 여덟 명인가? 소리는 X이 새로 나게 크더니 다섯 명 밖에 없잖아?"
"고자보다 못한 황제놈이 불만만 가득해서는 쯧쯧…"
황제는 별 말이 없었으나, 소환된 무리 중에 한 명이 자신의 말에 잠시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을 흑인종 블랙잭은 똑똑히 보고 있었다. 블랙잭은 황제에게 다가가 귀엣말로 그것을 전했다. 황제는 웃지 않았다.
"아무튼 환영하는 바이다. 제국민의 신성한 의무를 수호하고, 조세정의 실현을 위해 힘써 노력하거라."
"황제폐하, 잠시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글렌더스 공작, 무슨 일인가. 혹 그 낯부끄러운 말투를 다시 쓰려는 것이라면 내 기필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그리 알도록 하라."
글렌더스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에이 씨. 치사하게 너만 하고 빠지냐! 이건 됐고. 쓸데없는 세 놈은 다시 보내자고."
글렌더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회의실에서 양젖을 짜던 사내와, 목욕하던 도중에 소환되어 온몸을 가리고 벌벌떠는 여인, 그리고 자기가 싼 변 위에 도로 자빠진 전 재무장관 아르타곤의 손자며느리는 사라졌다.
"어! 그때 봤던 멋진 오빠잖아~ 저하고 같이 놀고 싶어서 여기에 계셨던 건가요?"
세 명이 다시 가고, 아직 남아있는 두 명 중에 한 여인이 글렌더스에게 아는척을 했다.
"허허허. 이름이 루넬리아였던가? 오랜만이야."
루넬리아의 인사를 받은 글렌더스의 얼굴이 급작스럽게 활작 개었다. 그러더니, 내일 온다면서 왜 한 번도 안 왔느냐, 할 일이 있어서 바빴다, 그럼 언제든지 좋으니 들렀다 가라, 알겠다, 등의 얘기를 나누며 그는 루넬리아를 데리고 회의실의 구석자리로 이동했다.
"좋다. 어디에 앉든 상관은 없겠지. 저 루넬리아라는 아가씨는 이제 됐고, 거 자네는 뭔가?"
황제가 턱끝으로 가리킨 곳에는 새까맣게 타버린 시약병을 들고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청년이 있었다.
"보시다 시피 마법연구 하다 끌려온 궁정 마법산데요?"
"허허. 내 잠시 새하얀 피부를 가진 마법사를 보니 이질감이 느껴져서 그랬네. 그럼 자네 이름이…"
"모르간이라고 불러주십쇼. 대마법사의 마지막 자존심입니다."
"칫. 별 게 다 자존심이구나. 알겠네."
황제의 태연함에 오히려 모르간 자신이 놀랐다. 분명 '궁.정.마.법.사'라고 아무렇지 않게 일러줬는데도 콧방귀나 뀌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어째 새황제가 즉위한 지 수개월이 지나서도 자신을 한 번도 부르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모르간은 그것을 자신의 뛰어난 외모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어, 어 이게 아닌데. 저 궁.정.마.법.사.라.니.까.요."
"그래서 어쩔? 넌.내.가.부.른.게.아.니.다. 불만이면 저기 흑인종한테 가서 따지도록 하여라."
모르간은 적잖이 당황해버렸다. 자신의 뛰어난 용모 때문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인가. 어찌하여 약관의 나이에 대마법사 소리를 듣는 이 모르간을 무시한단 말이가. 따위의 생각을 하며 모르간은 온몸을 덜덜 떨었다. 그러다 황제의 옆에 붙어있는 흑인종을 보게 되었고, 제아무리 흑인종이라도 자신보다는 지위가 낮을 것이라고 생각한 모르간은 세게 나갔다.
"제 아무리 위아래가 없는 깜둥이라지만 네놈이 제국 마법사들의 우두머리인 나를 함부로 소환할 자격이 있는 게냐?"
블랙잭은 그저 웃었다.
"흰둥이 주제에 건방지니 좋구나. 흑인종의 뜨거운 맛을 보여주지. 『밤의 황제가 너를 부르니, 부름에 응답하라!』"
"쳇. 깜둥이가 흑마법을 쓰니 곧잘 어울리는군. 좋다."
다크포스가 물씬 풍기는 공간이동 게이트를 통과하며 모르간이 말했다.
"흠흠. 아무튼 저 몹쓸 것들은 냅두고, 이번 위원회의 첫 회의를 시작하겠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글렌더스 자네가 직접 수고를 해야겠네만."
"알았어, 알았다고."
텅 비어있던 회의실의 책상에는 '황실 직속 체납감시 특별위원회'라는 제목의 책이 인원 수 만큼 놓였다.
"책의 제목이 곧 우리 위원회의 정식명칭이다. 그 내용은, 다들 알겠지만 우리 대제국의 세수 확보에 훼방을 놓는 밥버러지들을 특별관리하기 위한 모든 방법이 주가 된다."
"저기요, 근데 왜 제가 위원회라는 데에 속하게 된 거에요?"
"아, 루넬리아양. 그건 힘이 세서 그런 것이에요. 앞으로 몸으로 부대낄 일이 많을 테니 재밌는 일 많이 하게 될 걸 요?"
"와아! 아버지는 저보고 항상 '여자는 그렇게 힘이 세면 안 된단다!' 하고 꾸짖으셨거든요. 황제오빠는 정말 멋진 사람 같아요~"
루넬리아의 눈빛이 한껏 초롱초롱해진 것을 발견한 글렌더스는 암담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죽어라 싸우는 두 마법사를 빼놓고 황제는 나머지 위원들에게 앞으로의 활동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귀족. 그 똥싸는 기계들에겐 배불리 먹일 의무도, 자위권을 인정해줄 이유도 없다. 물론 이건 내 사견이므로 귀공들은 새겨 듣지 말아야 한다. 어쨌든, 그런 이유에서 꼬투리 잡힐 게 없는 놈들은 제외하고, 세금을 안 내는 귀족 나부랭이들과는 내일부로 끝장을 볼 생각이다. 그대들도 그 똥싸는 기계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연습을 할 바에야 차라리 있는 힘껏 재주를 부려 그놈들의 창자로 소시지를 만들 생각을 해놓는 게 좋을 것이다."
글렌더스는 황제가 '소시지'를 힘주어 말할 때 루넬리아의 황홀해 하는 표정을 보고 잠시 음울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엔… 글렌더스가 대표자격으로 내와 맺은 '드래곤과인간의상호공존과평화로운문명발전의토대를위한기본합의서'에 의하여, 제국내의 모든 드래곤들은 시민권을 발급받고, 제국민의 일원으로서 신성한 의무를 이행하게 되었다. 여기선 납세 부문에 한정하여 논의하도록 하겠다."
어차피 직접적인 무력시위의 핵이라 할 수 있는 두 마법사들이 한창 결투를 하고 있었기에, 실질적인 논의는 이루어 지지 않았다. 30여 분을 더 기다렸지만, 결투가 도무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황제의 인내가 한계에 도달했다.
"루넬리아양, 혹시 저번 차원이동 중에 봤다던 그 방망이를 하나 만들어 낼 수 있겠어요?"
"네. 역시 황제 오빠도 붸이스볼에 관심이 있었군요~"
"하하하. 그럼요."
루넬리아의 손에서 잠시 빛이 쏘아지더니, 빛으로 둘러싸인 방망이가 만들어 졌다. 루넬리아는 이것을 곧장 황제에게 건넸다. 글렌더스는 다 귀찮다는 듯 느릿느릿 주문을 외웠다.
"《네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빨리 갔다 와라."
사라졌던 황제가 다시 나타난 것은 채 3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황제는 양 어깨에 각각 마법사 하나씩을 들쳐메고 나타났는데, 두 마법사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회의를 재개한다."
황제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져 있었다.
말썽많았던 위원회의 첫 소집이 끝나고, 황제는 내일부터 있을 체납자 단속을 준비하고 있었다.
"깜둥이. 어중이 떠중이들은 형식적으로 돌자고. 그놈들은 재산 몰수령 한 번이면 쪽박이니까 귀찮아질 필요 없잖아?"
"크으으. 너무 아프다. 네 제안에 답을 해주고 싶어도 머리가 굴러가질 않는다."
위원회 첫 소집에서 너무 격한 결투를 펼친 후유증이었는지, 블랙잭은 황제의 침상위를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는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황제에게 재차 말했다.
"후우. 그 버르장머리 없는 궁정마법사 녀석. '주신의 향유에서 물장구를 치는 인간' 이란 말을 듣는 흰둥이 답게 어디 빠지는 데가 없더군. 물론 한 군데를 빼고 말이지."
"또 쓸데없는 소리. 어차피 여기서 이러고 있을 협의 내용도 없으니 그냥 자러 가는 것이 어떠냐."
"알았다, 황제폐하. 괜시리 민감해서는. 쯧쯧"
블랙잭이 자리를 떠나자, 황제의 침실은 곧바로 불이 꺼졌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아무 일도 없었다.
"자 날이면 날마다 오는 세금독촉장이 아니야. 싸잡아 골라. 공짜니까 마음놓고 골라. 골라 골라 '형장의 이슬 무료시음권', 골라 골라 '기아체험, 첫니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골라 골라 골라라 골라…"
귀족가를 절묘하게 가로지르며 외치는 함성에,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나와 있었다. 큰 목소리를 질러대며 이 많은 군중을 불러댄 청년은 목에 '나는 이 제국의 황제이니라.' 라는 팻말을 걸어뒀기 때문인지, 그는 엄청난 비난과 환호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그리고 거리에 나온 많은 사람들은 곧이어, 좀처럼 보기 힘든 귀족나리들이 잔뜩 모여서 저 무례한 청년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것을 보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폐 폐하. 신들의 불충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한 노귀족의 간청에 맞춰 족히 수백은 넘길 만한 귀족들이 '용서하여 주시옵소서!'를 따라 외쳤다. 그러나 앞의 청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그들을 지나쳤다. 마음이 다급해진 듯, 귀족들의 앞에 나와있던 한 사내가 자신을 그냥 지나쳐 가는 청년의 옷깃을 붙잡았지만 그 청년은 불같이 화를 내며 자신의 옷깃을 잡아챈 사내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말했다.
"더럽고 추잡하며 돼지같은 남자야. 네 소원이 정녕 돼지가 되는 것이라면 내 그렇게 해 줄 것이니라. 그리고 나머지 돼지들은 들어라. 너희 자식들에게 더이상의 잔치는 없다. 이상!"
자리에 모여 머리를 조아리던 귀족들은 얼굴빛이 쥐색이 되어버렸다. 자신을 황제라 칭하는 청년과 그 일행은 이미 그들을 무시한 채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제국 최북단에서도 배를 타고 보름은 족히 가야만 볼 수 있다는 활화산에서, '나는 이 제국의 황제이니라' 라는 팻말을 목에 걸고 다니던 청년은 될대로 되라는 듯이 활화산 분화구를 향해 머리를 내놓고 누워버렸다. 시간이 조금 지나, 그의 일행들이 속속 도착했지만, 다들 표정이 좋지 못했다.
"이야. 죽어라 삽질만 하는구나. 마지막으로 확인했으니 이젠 결론났지 않았나, 글렌더스?"
"그렇지. 여기 '얼음화산'에도 아무도 없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짝짓기 철이 돌아온 듯 싶다."
"잉. 그럼 오빠들하고 왔다갔다 한 보람이 없는 건가요?"
얼음인형처럼 온몸에 고드름을 달고 있는 여인이 물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루넬리아. 결국은 하나 남은 그 애송이를 만날 수밖에 없겠어. 조금만 쉬었다 그쪽으로 이동하자."
루넬리아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글렌더스는 루넬리아가 풀이 죽었으리라 짐작하고 위로해 주기 위해 다가가려고 했으나,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기운에 흠칫 놀랐다. 글렌더스는 그녀의 살기가 자신에게 향한 것이 아님을 알고 안심했다.
"칫. 또 너냐? 내가 마법으로 장난질 하지 말라고 경고 안 했던가!"
루넬리아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이윽고 루넬리아는 자신의 애병 - 빛을 발하는 몽둥이 - 을 들어 허공을 향해 겨냥했다.
"좋아. 이번에는 어제 성공한 차원이동을 통해 배운 어퍼컷 스윙으로 상대해 줄 테야!"
루넬리아의 가느다란 두 다리가 땅을 박차고 올랐다. 그러자 이제껏 존재조차 알 수 없었던 투명한 그림자가 황급히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루넬리아의 패도적인 기세에 눌렸는지 상대를 따돌리지 못하고 거리를 잡혀버렸다. 루넬리아가 그 투명한 형체를 붙잡자, 투명화 효과가 사라지며 한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는 속박당한 상태로 눈알만 굴리고 있었다.
"제국 최고의 대마법사께서 참으로 훌륭하신 모습으로 계시는군? 헤헤헤. 황제보다도 못한 네놈에게 자비란 없다!"
제국 최고의 대마법사, 모르간을 날려버리기 위해 루넬리아는 특유의 외다리 타법을 시전했다. 앞쪽 다리를 높이 들고, 오른쪽 팔꿈치를 뒤로 젖혀 장전하며, 그다음 뒤로 돌아 나오는 방망이에 허리와 엉덩이의 회전력, 그리고 들어올린 다리를 땅에 내딛는 동작에서 끌어올린 힘을 최대로 모았다.
"이번에야 말로 반드시 죽어라, 모르간!"
루넬리아의 광소와 함께 발사된 방망이가 모르간의 복부를 그대로 통타했다. 그 충격으로 모르간은 각혈을 하며 산을 벗어나 끝없이 날아갔다.
그 광경을 전부 지켜본 흑인종은 루넬리아에게 다가가 '언니, 나이스샷!'을 외쳤다.
손바닥 만한 창문에서 새어나오는 빛이 전부인 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불안감을 감추지 못해 줄곧 떠들어 대고 있었다.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요. 나 하나 살기도 바쁜데 왜들 자꾸 그러시는겁니까!"
"이보시오! 그러니까 내 말은, 당신 혼자만 살자는 생각 말고 다같이 살아남을 방도를 찾아 보잔 말이오."
"허허. 플란다스 백작. 내 당신은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이런 식으로 뒷통수를 칠 수 있는 것이오. 아주 큰 실망을 했어요, 나는!"
"다들 나보고 뭘 어쩌란 말입니까. 아르타곤 공작가마저도 별다른 이유도 없이 반나절만에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이 땅에서 파리목숨 날리며 사느니, 차라리 명예고 뭐고 다 버려서 개같이 살아남고 말겠습니다.."
각자 서로를 헐뜯는 것에만 열중해 언성만 높아져 가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 목이 날아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분위기가 과열됐을 때, 어디에선가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모든 눈길이 집중된 가운데, 그 무리의 앞에 서있는 자의 얼굴이 드러나자 주변의 혼란이 단번에 진정되었다.
"이런 정신상태로 죽지 않는 것을 바란단 말인가! 이번 회의를 기회로 귀족회의 회생을 도모해볼까 했네만, 자네들의 태도로 봐선 그 달려있는 목이나 지켜내는 것도 힘들 것이네."
단 한 번에 분위기를 가라앉히며 등장한 사내는 단 하나 비어있는 테이블 맨 끝자리에 앉았다.
"둔하고, 오줌싸개였지만, 아르타곤은 능력 있는 자였다. 왕당파를 우리 귀족회에 흡수시켜 황권을 위협하는 일을 해냈던 그가, 새황제 앞에서는 고양이 앞에 쥐 마냥 아무힘도 쓰지 못하고 간단한 누명 하나에 처형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즉, 지금의 황제가 선황 같이 힘도 능력도 없는 약해빠진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누구도 말이 없었다. 사내는 눈을 부릅떴다.
"전 황제에게 18명의 부인을 안긴 것도, 블랙 드래곤 '쉬파롬두르'를 풀어놓은 것도 다 아르타곤이 해낸 업적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안마나 받으며 있던 황제에게 한 마디 말도 못 하고 무엇을 했느냐. 아르타곤을 죽인 것이 황제의 짓이냐, 아니면 너희들 때문인가! 왜 너희들은 공동의 이익을 보지 못한 것이냐. 혹 아르타곤이 죽음으로써 돌아오는 파이조각이 조금더 커질 것이라 생각해 방관한 것은 아닌가? 게으름에도 정도가 있지, 너희들은 결국 돼지같이 조금이라도 더 쳐먹기 위해 귀족이 된 것이지. 어디 내 말이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
이어지는 사내의 질책에 모여있는 귀족들은 변명 조차 할 수 없었다.
"자 잘못을… 바로잡겠습니다, 대공작 전하."
"좋다. 산 채로 죽든, 기름솥에 튀겨 죽든 내 알 바 아니나, 내 말을 듣고 따르면 최대한의 성의를 보여 단두대에서 목을 잘라주겠다. 여봐라, 나눠주거라!"
사내의 명령을 받은 자들이 귀족들에게 하나씩 봉인된 양피지를 나누어 주었다. 양피지를 펴 본 귀족들의 입에선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대공작으로 불린 사내는 손바닥으로 책상을 때려 분위기를 바로잡았다.
"황제는 이곳에 없다. 그의 심복 또한 없다. 우리를 단체로 엿먹인 그 글렌더스란 애송이도 없다. 그리고 황궁 안 마법방해장도 사라져 있다. 알겠나? 이번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니 죽음을 각오하라. 진정 죽음을 각오한 자라면 산 채로 껍질이 벗겨져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자세한 것은 그 양피지에 적혀 있으니 알아서 하도록. 해산."
어린 드래곤 라이코스는 온몸을 말고 잔뜩 움츠렸다. 저 멀리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소음과, 멀리서 가해진 충격에 의해 레어의 지반이 흔들리며 떨어지는 낙석이 무서웠던 것이다. 이제 헤츨링 시기를 벗어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두려움이 더 컸다.
더구나 평소 같았으면 성룡들의 보호를 받아 어떤 위협에도 안전했지만, 하필이면 지금 몇천 년 만에 번식기가 찾아와 대륙의 모든 다자란 드래곤들이 다른 곳으로 이동해 있는 상태여서 자신을 지킬 어떠한 수단도 없었다. 몸집이라도 작으면 좋으련만, 하필 한참 성장기라 하루가 다르게 몸집이 커져서 이젠 어디 숨어있기도 벅찼다.
긴장해 있는 라이코스에게, 밖의 소음은 마치 자신의 귓가에 대고 고함을 지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야. 한창 살이올라 야들야들 하면서도 감칠맛이 도는 고기를 지닌 말하는 도마뱀아! 지금 당장 나오면 통으로 구워줄테니 어서 빨리 고개를 내밀어라."
"저기. 제가 지금 화났거든요? 빨리 안 나오면 쳐들어 가서 이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패줄 예정이랍니다!"
황제와 루넬리아는 어떻게든 그 어린 드래곤을 끌어내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두 얼간이 마법사들이 간밤의 결투로 또다시 중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글렌더스에게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이들은 그저 어린 드래곤이 얌전히 고개를 내밀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나절이 지났다.
이젠 글렌더스 본인도 지쳤는지, 곧바로 소환주문을 사용해 어린 드래곤을 레어 밖으로 끌어냈다.
글렌더스와 조용히 얘기를 나누는 라이코스를 보며, 황제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너무 오랜 시간을 잠들지 않고 버티고 있었던 탓이었다.
"아함. 루넬리아양. 저 도마뱀과 나누지 못한 얘기는 내일 마저 하도록 합시다. 졸립군요."
"으으으응. 네…"
황제는 졸음에 겨운 루넬리아를 업고, 두 사람이 편히 누울 수 있을 만한 장소를 찾아 이동했다.
같은 시각, 플란다스 백작의 집무실에는 그와 비슷한 연배의 귀족들이 모여 앉아 앞으로의 정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쨌거나 젊은 귀족층에 속하는 그들로서는 이번 정변의 실무를 담당할 책임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 제반사항들을 준비해 둬야만 했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해야만 하는 건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사태의 절박함에는 동감 하지만 대공께서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극단적이었던 것은 자네 또한 마찬가지 아니었는가. 자네, 지난 번 회의에서는 크게 실수했었던 것이네. 아무리 그래도 지금 쥐고 있는 기득권을 버리고 타국으로 간다는 것은 해도 너무 했던 것 아닌가. 어쨌든 오랜만에 등장하신 대공께서 귀족회의 의견을 잘 통합해 주셨으니 그나마 다행이네. 그렇지 않았다면 자네, 이도 저도 아니게 될 수도 있었음이야."
플란다스 백작은 애끓는 가슴을 스스로 삭힐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찔러줘도 도무지 알아먹지를 못하는 인간들이라는 점에서, 플란다스는 이미 그의 친우들을 포기한 상태였다. 겉으로는 이렇게 정변을 위한 대책을 논의하고는 있지만, 실제로 그는 어떻게든 도망칠 방도만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플란다스는 마지막 희망을 걸고 그의 생각을 정리해 말했다.
"휴우. 분명 지금의 사태에서는 즉위한 지 채 1년이 되지 않는 황제를 내려앉히는 것이 최선의 선택으로 보일 겁니다. 솔직한 심정으로, 지금의 황제에게 10년을 아부하든 100년을 아부하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마 100년 충성의 끄트머리엔 백작 작위가 일개 집사로 바뀌어 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귀족회에서도 이번 정변에 대해 얘기가 나왔고, 대다수의 귀족들이 이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도 다들 여기까지는 생각을 하고 계시더군요. 허나 그 뒤는 어떻게 보십니까?"
플란다스의 목소리가 잠시 떨렸다. 그는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친우들을 외면한 채 테라스로 다가갔다. 선선한 봄바람이 그의 솜털을 간질였다.
"현황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돈? 권력? 여자? 전쟁? 애석하게도 전부 아닙니다. 분명 선대 황제는 엄청난 호색한이었습니다. 아르타곤이 붙여준 18정실 이외에도 그 스스로 물경 3천에 이르는 여자들을 섭렵했습니다. 그랬기에 세상을 보는 눈이 흐렸고, 18황후의 곁에서 평생을 씨만 뿌리며 보냈습니다. 저는 그런 황제의 아들인 현황제 또한 그와 비슷한 길을 걷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었습니다. 그래서 나름 열심히 지켜보았지요.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그는 돈을 쓸 일이 없는 위인이며, 스스로가 어전 회의에서 막말을 하고 귀족회와 정면으로 대립하면서으로서 귀족회의 권위를 뭉개버렸고, 지금까지 단 하나의 부인에 단 하나의 황녀만을 두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국의 국력으로 볼 때 전쟁광이 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황제는 과연 무엇에 흥미가 있는 것일까요?
우습게도, 지금까지 황제가 관심을 보인 유일한 것은 세금입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도 그는 비정상적인 집착과 몰상식한 태도를 보이며 끊임없이 폭군의 이미지를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에게 다른 모든 것은 전혀 필요없습니다. 누구를 죽이네, 마네, 그것도 모자라 귀족회를 쥐고 흔드는 것도 다 세금과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분명 황제는 도가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이 '미래'라는 요인을 가정한 때입니다. 이 상황에서 정변을 꾀하고, 황권을 위협하는 것이 정당한 것일까요? 아르타곤 후작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가 재무대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어떤 단체를 이끌었는 지 다들 아실 테지요. 사실 황제는 이것만을 빌미로도 재무부 귀족들의 씨를 말릴 수 있었습니다. 제국의 재정을 담당할 자들이 조세저항을 주도한다. 참으로 몰상식한 이야기 아닙니까?"
말을 마치고 플란다스 백작은 다시 고개를 돌려 바깥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이 짙게 깔려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지만 그에겐 무언가 기분전환의 계기가 필요했다.
그에게 아무 힐난도, 놀라움도 표현하지 않는 친우들을 속으로 비웃는 것만이 플란다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래도 그 비웃음은 잠시 멈출 수 있었다.
"자네는 지금 되도 않는 싸움을 할 바에야 차라리 도망치자는 말을 하는 것이지 않은가. 그런 말이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하하하. 예. 그럴 수도 있겠지요. 사실은 저도 죽도록 싸워서 이겨보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 귀족들은 정변 성공으로 인해 확실한 반대급부를 챙기게 될 테니까요.그런데 말이죠, 그런 생각으로는 도리어 우리가 망한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지금의 황제 밑에서 귀족 자리를 연명하다 화병에 걸려 죽는 것이, 정변에 성공해 목에 매일같이 기름칠을 하다 죽는 때보다는 더 늦을 것이라고 봅니다. 황제가 그냥 세금이나 뜯으며 놀고 먹은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어디에도 발을 뺄 공간이 없죠. 어전회의에서 결정된 안건의 집행시기는 채 이틀이 걸리지 않습니다. 계도기간이고 뭐고 갑작스런 제도 변경으로 인한 혼란 따위 싹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 점이 정변을 성공했다손 치다라도 귀족회를 끊임없이 위협할 것은 자명합니다. 황제의 주도로 법 질서와 제도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귀족들이 또다서 백성들을 혼란스럽게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황제의 개혁이 백성을 착취합니까? 못 살게 굽니까? 우리에겐 독입니다. 황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귀족을 귀족답게 존속시킬 생각이 없습니다. 설령 정변이 성공한다손 치더라도요. 윗 분들이 그걸 아느냐가 문제겠지만…
얼마전에 저도 길거리에서 황제를 봤습니다. 전반적으로 잊을 수 없는 날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그의 마지막 말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다들 그 말의 의미를 해석하며 열불을 내고 계실 겁니다. 처음엔 저도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다른 귀족들 처럼 그렇게 들었습니다. "너희 자식들에게 더이상의 잔치는 없다.라고 했었죠.
또한, 윗분들 께서는 세상이 우리 귀족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긴 말 할 필요도 없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이 한 마디로써 그는 성군이면서도 폭군인 황제의 자질을 갖추었다 볼 수 있습니다. 황제의 마지막 말의 참뜻을 알아챈 사람이라면 이처럼 무모한 계획에서 빠지려고 안간힘을 다했을 겁니다. 먹이를 물고자 해도, 맛만 보고 마려고 해도 반드시 죽습니다. 그러나, 눈 한 번 딱 같고 먹이를 외면한다면 남들에게 개처럼 먹이를 구걸해서라도 살 수 있을 테죠."
고개를 돌아본 플란다스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의 친우들이 그새 모두 골아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힘들게 속내를 털어놓았던 플란다스에게는 맥이 빠지는 광경이었다.
어린 드래곤 라이코스의 레어에 아침이 찾아왔다. 밤사이 조금의 비가 내렸는지 울창한 숲은 싱그러운 풀향기를 한층 더 촉촉하게 내뿜고 있었다.
루넬리아가 가만히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의 바로 옆에서 황제가 잠들어 있는 것을 보며 의아하게 생각했다. 어찌됐든 대제국의 황제일진대 이런 산속 동굴로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참을 청할 수 있다니. 한편으로는 이런 황제가 귀엽게 느껴져서 조그맣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황제의 머리를 똑바로 뉘었다.
그녀는 황제가 깨지 않도록 조심히 일어났다. 산도, 사람도 깊이 잠들어 있었기에 그 어느것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동굴 밖으로 나온 루넬리아의 시야에 두 물체가 잡혔다. 전날의 마법 결투로도 성이 안 풀렸는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주먹을 교환한 모양이었다. 루넬리아는 발을 가볍게 놀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잠들어 있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한 블랙잭과, 자면서도 가슴에 통증을 느끼는 듯 양손으로 가슴팍을 붙잡은 모르간. 루넬리아는 생각했다.
어쩌면 저들은 평생 싸워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상대에 대한 단순한 적의만으로 싸우는 것은 아니다. 전혀 공통점이 없을 것 같던 그들이, 같은 종류의 눈물을 흘리며 잠들어 있으니까.
루넬리아는 모르간의 앞에 앉았다. 모르간은 잠결에 뒤척이면서 다시 울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모르간의 입술에 닿았다.
"미안해요." 그녀가 말했다.
저 깊은 동굴속에서는 분명 어린 라이코스와 글렌더스가 서로를 부둥켜 안고 잠들어 있을 것이다.
루넬리아는 알고있다. 글렌더스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던 것을. 분명 저들 모두가 나눠 가졌을…
"알 것 같아요. 당신들, 충분히 괴롭죠?"
루넬리아의 모습이 빛으로 점멸하며 멀어져 간다. 빽빽한 잡목림이 그녀의 자취를 감춰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목소리가 메아리 치며 들려왔다.
"슬퍼하지 말아요."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았고, 플란다스 백작성 최고층의 테라스에는 한 남자가 빈 잔을 들고 서 있었다.
산과 산의 사이로 드문드문 구름 같은 안개가 끼어있다. 잠시, 그는 온세상이 저 안개빛으로 물들어 모든 것을 가려줬으면 하고 소원을 빌어본다.
하지만, 저 안개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그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기에 소원은 소원만으로 의미를 가지리라.
분명 오늘 아침은 화창할 것이다.
그는 허리춤에 메어둔 검을 뽑았다. 검면에 고급스런 음각이 새겨져 있었다. '개는 언제나 플란다스의 친구…'
플란다스 백작은 참지 못하고 피식 웃어버렸다. 그의 손이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검술 수련에 매진하던 청년 때의 느낌과는 전혀 달랐다. 남의 부인을 만지는 듯, 조심스럽고 두려웠다.
그러나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오직 보이는 것을 믿고, 자신을 자신에게 믿고 맡겨야만 한다.
결국 그가 이 밤을 지내며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자신이 잠든 사이에 친우들은 어디 성내의 온천이라도 즐기러 나갔을 것이다.
그는 충동적으로 잔을 테라스 밖으로 던져버렸다. 멀리 멀리 날아가 숲속 어딘가에 떨어진 것 같았다. 깨지는 소리가 나지 않았으니, 어딘가의 숲속 이끼가 품고 있으려나.
백작성의 테라스에 서 있던 플란다스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자. 이제 무대를 바꿔서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아직 더 자고싶은데 어떻게 더 안 되나?"
"나 나도…"
의욕으로 가득찬 황제와 부스스한 머리에 눈이 풀린 흑인종 블랙잭, 그리고 한 마디 겨우 하고 다시 꾸벅꾸벅 조는 모르간은 일어나 보니 온 데 간 데 없는 루넬리아와 어디엔가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드래곤 두 마리를 반찬삼아 실컷 떠들어 대고 있었다.
거의 정신을 놓다시피 했던 모르간이 정신을 차릴 동안, 그들 주변의 변화는 전무했고, 황제는 화를, 블랙잭은 짜증을 내었다.
"에이 다 짜증나. 블랙잭 네가 좀 알아보면 안 되냐?"
"아 나보고 어쩔. 쫌!"
배는 꼬박꼬박 고파오고, 두 멍청한 마법사는 앞으로 두어 시간은 마법을 쓸 수 없다. 그야말로 어이상실의 상황이었다. 더이상 못 참겠다는 듯, 황제가 두 마법사에게 동굴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들은 온몸을 가로저으며 거절했다.
시간히 흘러 그들 모두가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에게 먹을 것을 구해오도록 시키자는 데에 이견이 없어질 즈음에, 글렌더스와 라이코스가 몹시 피로에 지친 얼굴로 나타났다.
"니들 굶은 거 맞냐. 뭔 소리가 이렇게 커. 라이코스야, 서둘러 처리할 일이 있으니 장소를 좀 옮겨야 겠다. 준비하렴."
글렌더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황제와 블랙잭, 모르간은 글렌더스의 몸에 자신들의 빰을 비벼댔다. 그들의 머릿속엔 '이제 살았다!' 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그나마 주변을 아주 조금이라도 더 신경쓸 줄 아는 모르간은 무언가 놓친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저기… 글렌더스님? 루넬리아양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쪽 주변은 왜 뾰족귀 놈들이 설치는 나와바리… 아니, 구역 이잖습니까.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흐음… 안타깝게도 그녀는 자신이 있고자 할 때만 '여기'에 존재하네. 그러니 사실 그녀를 찾을 래야 찾을 수도 없어요. 그렇다고 길을 잃거나 몹쓸 짓을 당할 리는 전혀 없으니 안심하고 우리끼리 먼저 이동하세."
글렌더스의 태연함에 전염된 모르간은 그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그곳으로!》"
글렌더스의 주위로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진동이 끝남과 동시에 그들은 사라져버렸다.
"드래곤과 맺은 모든 종류의 맹약은 어느 누구에게도 그 내용의 공개를 요구할 권리가 없다. 따라서 '드래곤과인간의상호공존과평화로운문명발전의토대를위한기본합의서'의 체결 당사자가 아닌 모든 대상은 체결 당사자 양방이 그 합의문의 열람을 허락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읽을 수도, 그 내용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도 없다. 그러니 라이코스, 네가 협상 결과에 대해 보복을 받는다거나 할 일은 전혀 없다. 안심하거라."
글렌더스와 라이코스 이외에 황궁 제 1 대회의실의 몇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나머지 세 명은, 시녀들의 혹독한 앞담화를 들으면서도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그로 인해 보통의 네 배가 넘는 엄청난 아침식사를 이곳으로 배달해놓고 신나게 먹어치울 수 있었다.
"아. 저기 저 사람들 너무 무서워요. 정녕 인간이 맞는 건가요? 마치 돼지가 인간의 탈을 쓴 것 처럼 흉측해 보이네요. 아무리 먹는게 좋더라도 그렇지…"
흑인종, 블랙잭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지만, 그는 이내 무시해버리고 라키온산 최상품 포도주를 입에 들이켰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블랙잭이 모르간을 쳐다보았지만… 역시나였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대마법사 모르간은 그저 한 마리 돼지일 뿐이었다.
"뭐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 저들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이니… 그건 됐고, 네가 아직 어리니 내가 조언정도는 해 줄 수 있겠구나. 그렇지만 네 스스로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하는 것도 잊지 말거라. 지금의 나는 전적으로 의지할 사람이 못 돼거든."
라이코스의 마음이 한층 무거워 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오직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 '그녀'를 찾아내기 위해 이렇게 위험한 내기까지 마다하지 않는 라이코스였다.
"다들 모였나."
"예. 대공께서 단상에 오르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았다. 곧 내려간다고 전하거라."
"존명."
대공은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번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그 다음은 없었다. 손이 가늘게 떨려왔지만, 그것을 억누를 방법 조차 찾지 못했다.
그는 지금도 이 정변이 자신만을 위한 것인지, 명목상 대의를 위한 것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한때는 권력의 맛에 길들여진 탓에 자신의 눈이 흐려진 것이 아닐까 생각해봤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앞으로의 일에 전혀 필요치 않은 생각이었다.
거울에 비친 대공의 모습은, 일체형 전신갑옷에 머리만을 내놓고 있었다. 그는 갑옷의 마지막, 투구를 들어 마력으로 목 부분에 끼워맞췄다.
투구의 눈구멍으로 서늘한 안광이 나타났다.
"우리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밟고 서 있다. 어느 누군가는 그것을 위태롭게 볼 수도 있겠으나 나와 그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작금의 상황에서 당장 명줄을 잡아 끊든, 황제의 밑에 남아 서서히 말라 죽어가든, 고통은 동일할 것이기에 저 둘은 다르지 않다.
긴 말 하지 않겠다. 우리는 반드시 싸워 이겨, 폭정으로 제국의 운명을 위태롭게 하는 그 추잡한 황제놈의 목을 따야만 한다. 이에 선택의 여지는 없으며, 우리는 황제의 억압에 맞서 새로운 자손들의 더욱더 화려한 잔치를 만들어 내야할 의무가 있다. 지금 달려가 제국의 운명을 바꾸어 보자!"
족히 10만은 될 법한 수의 병사들이 온몸을 비틀며 함성을 내질렀다. 그들의 하늘을 찌를 듯한 사기에 보답하여, 대공이 자신의 검을 하늘 높이 들었다.
"흠. 그래 이제 협의문을 다시 읽고 서로 승인하면 되겠군. 이제 마지막이다. 이야호!"
황제의 환호성이 황궁 제 1 대회의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장장 네 시간을 이어진 지루한 협상이 끝났다. 라이코스의 얼굴은 이미 몇 시간 전부터 사색이 되어있었다. 그나마 글렌더스의 협조로 어느 정도선에서 황제의 악행이 멈춰질 수 있었다. 만약 글렌더스가 나서서 '드래곤의 무력사용에 대한 법률 제 11조 ① - 제국내의 모든 드래곤은 제국 외부의 드래곤이 제국에 어떠한 부정적인 효과를 미치게 할 우려가 있을 경우에 그것을 제지해야 할 책임을 진다.' 를 막지 못했다면, 황제가 이보다 더 끔찍한 '드래곤 가족제도 시행령'을 보너스로 협상 테이블에 끄집어 낼 수도 있었다. 여러 모로 드래곤측이 지고 넘어간 협상이었다. 그것은 갓 헤츨링기를 벗어난 라이코스 조차 회의석에 앉아서 소변을 보며 벌벌 떨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흠. 이제 양방의 승인을 마쳤으니, '드래곤과인간의상호공존과평화로운문명발전의토대를위한기본합의서' 에 관한 추가적인 협상을 마치도록 하겠소."
블랙잭이 황제에게 슬그머니 다가왔다.
"황제 너 설마 '그것'은… 제길 난 이제서야 알아챘다."
"'블랙잭군은 눈치가 없어요.'를 이제 알았냐? 개인적으로, 아주아주아주 마음에 드는 협상이었다. 어디 한 번 황제 전용 목욕탕에서 그동안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 내볼까~"
흑인종, 블랙잭의 얼굴은 눈에 띄게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물론 아주 조금 하얘진 것처럼 보일 뿐이지만.
허가받지 않은 대부대가 제국의 수도로 집결하고 있다는 사실이 수도방위군에 들어왔다. 대륙 최고의 무용을 자랑하는 황성근위기사단과 특수목적방위단이 속한 수도방위군이었지만, 수십만에 달하는 군세를 막는 것은 그들만으로는 몹시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반란군의 대외적인 목적이 황제폐위인 만큼 일반 제국민들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고 있었지만, 제국의 뛰어난 통신망을 통해 이 소식이 제국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다. 시시각각 수도로 다가오는 반란군 연합의 수가 점점 불어나고 있었지만, 수도방위군의 사령관은 어떠한 대책도 내놓지 못했다.이대로는 민심이 크게 돌아설 것이고, 결국 제국 전체가 흔들릴 위험이 있었다. 이것을 알기에 사령관의 속은 더더욱 까맣게 타들어갔다.
수도방위군은 분명 최정예 무력집단이었지만, 총동원령을 내려도 모일 수 있는 병사의 수가 고작 2만 명 뿐이었다. 더구나 황제가 군부 개혁을 주창하며 국방 예산을 일방적으로 삭감해버려서 보급이 적군에 비해 부족한 상황이었다. 수도방위군 사령관은 몇가지 대책을 세워보다, 기습이든 정공이든 가능성이 없음을 절감하고 크게 후퇴한 뒤에 얼마전에 완공된 신 수도방위군요새를 포기하고 이전부터 대륙 최고의 요새로 불리던 수도방위군 주둔요새에서 최후의 농성전을 준비했다.
반란군의 행렬이 수도를 얼마 앞두지 않았을 시점에서야, 황제에게 이 소식이 '공식적'으로 전달되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보고였기에 황제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황제는 다급한 상황임에도 대피 권고를 무시했다.
"전하. 한시가 급한 상황이옵니다! 반란군은 대공의 영토를 바탕으로 수십만의 병사가 몰려들고 있으나 수도방위군을 이를 황성 전체를 방어해서 막기에는 역부족이옵니다. 어서 제 2 황궁으로 대피하셔야 합니다!"
"시끄럽다. 난 전혀 불안하지 않고, 도망칠 마음도 없다. 도망치려면 그대나 도망치도록 하라."
"아… 전하. 어찌!"
근위기사단장의 절박한 보고를 받고도 황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꿈쩍도 않는 황제에게 이후에도 여러 차례 설득을 해봤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근위기사단장은 황제의 고집을 이기지 못한 채 하는 수 없이 제 2 황궁에서 농성전을 벌인다는 계획을 포기했다. 대신 전멸을 각오하고 황성 전체를 수호하는 전략을 수립했다.
"쳇. 결국 내 말 한마디에 저렇게 열렬한 반응을 보이는 구만. 멍청함도 정도가 있어야지, 저놈들은 생각이 없는 것이야. 저래서 어디 서정시 한 편이라도 쓰겠어?"
황제는 말을 마치고 혀를 찼다. 블랙잭은 잠시 화를 누르려는 듯 눈을 감았다가 황제에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왜 귀좀놈들이 단체로 재롱을 부리는데?"
"내가 팻말 걸고 다니면서 귀족들한테 협박할 때 했던 마지막 말 기억나지?"
블랙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들이 지들 무덤을 팔 셈인거지. 멋대로 작위세습제를 떠올린 모양이야. 킬킬킬"
블랙잭은 귀족들이 황제에게 당해도 싸다는 생각을 했다.
"훌쩍. 훌쩍. 어린 제가 봐도 저들은… 으아아아앙"
"휴우. 또 울면 큰일인데. 글렌더스 네가 좀 달래봐. 내가 애한테 협박이라도 한 듯이 보이잖아?"
글렌더스의 눈빛이 한층 날카로워졌다.
"말은 똑바로 해라. 너는 정말… 내 기대 이상이다."
진갈색 머리카락을 지닌 글렌더스와 상당히 진한 흑발의 라이코스는 서로 일면식도 없었고, 생김새 조차 확연히 달랐지만 나름의 유대감을 느꼈다.
"하아. 어쨌든 라이코스 네 사랑을 찾아준다는 약속을 지켜야 겠구나. 《이리오너라.》"
글렌더스의 소환에 응해 나타난 사람은 강렬한 빨간 머리를 지닌 소녀였다.
"무슨일로 저를 찾으셨지요?"
소녀의 온화한 말투에 글렌더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와 함께, 라이코스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 그래, 바쁜 와중에 불러서 미안하구나. 저기 블랙 애송이가 너를 좋아한대서 잠시 연락을 했다."
소녀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다 라이코스와 글렌더스, 그리고 황제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손바닥을 탁 쳤다.
"그래. 너였구나. 꽤나 어릴때였는데도 날 기억하네? 반가워."
"네. 저기 누나… 사실은 제가… 그러니까, 그게…"
소녀는 라이코스의 머뭇거리는 말투가 싫증이 났는지 콧김을 뿜었다.
"흥. 그 태도 뭐니? '수컷'이 돼가지고 고백 하나 못해서 어떻게 살려고 그래. 나 좋다는 건 알겠으니까 일단 나 좀 따라오렴."
라이코스는 일이 너무도 쉽게 풀려 당황했다. 때문에 몇 번을 주저하며 소녀에게 다가가지 않자, 소녀가 다시 화를 냈다.
"짝이 맺어지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나도 네가 싫지는 않으니까 상관없어. 그러니까 좀 서둘러!"
라이코스는 반색을 하며 소녀에게 다다갔고, 소녀는 공간이동 직전에 잠시 글렌더스에게 인사를 했다.
"한동안은 아버지 곁에 있지 못하겠네요. 어머니하고 화해해야 되는 거 잊지 않으셨죠? 그럼 다음에 뵐게요~"
라이코스의 눈이 크게 떠졌지만, 공간이동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라이코스와 소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라졌다.
"크으으. 내가 저 어린 드래곤에게 씻지 못할 죄를 저질렀구나."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오래 갈 것도 아니야. 나도 미친짓 오래하고 싶진 않다고! 그러니까 뚝. 착한 드래곤은 우는 거 아냐."
"하… 하지만. 분명 너는 상습체납 드래곤을 조진다는 명목으로 협상을 했던 게 아니냐. 흑흑"
황제의 위로를 받으며, 글렌더스는 눈물을 닦았다. 그 때, 반란군의 동태를 살피던 블랙잭이 귀환했다.
"반란군의 규모는 대략 25만. 대공이 홀로 10 만 이상을 모았다. 꽤나 질서가 잡혀있다. 수도까지 도착하는 데 얼마 안 남았다. 뭐 수뇌부 회의를 도청해 보니 내일 새벽에 진격한다는 얘기가 있었다. 어쩔 거냐?"
"이를 어쩌나 어째. 하필 이럴 때 루넬리아양이 없어서…"
"없어서?"
흑인종 블랙잭이 물었다.
"긴장이 안 돼."
블랙잭이 잠시 비틀거렸다.
"저런 발가락의 무좀균만도 못한 놈들에게 두려움을 느낄 리가 없지. 반란군 놈들이 전력질주로 수도에 다가와 맹공을 퍼부우면 모를까… 아. 이땐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었구나!"
"근데요, 저기 저도 명세기 궁정마법산데 도와드릴 일이 어디 없을까요? 일당 10만은 자신 있거든요."
"마음대로 하거라. 대신 싸우다 죽으면 장례는 후하게 열어주마. 그점 염려 말고 장렬히 싸우다 죽어라~"
사실상 '네 따위가 나가서 싸워봐야 제국 공동묘지 평수만 줄어든다.'는 말과 같은 뜻이었다. 모르간은 문득 가슴속에 차오르는 '무언가'를 느끼며 제 3 궁정마법사 연구실에 영원히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하하하. 전황이 아주 좋구려. 저 수도방위군 놈들도 오줌을 흠뻑 지렸는지 이젠 모습이 보이지도 않아요. 허허허허"
대공의 기분이 무척 좋아보였다. 그들은 아무 제지 없이 제국의 심장부까지 다가온 것이었다. 내일 있을 공격으로 그들의 심장부에 칼을 들이밀 수 있다는 기대감에 대공은 연신 술잔을 들었다.
아무리 구 수도방위요새가 난공불락인들, 요새 안에 심어 놓은 수많은 부대가 알아서 문을 열어 줄 것이다.
전시 상황이었지만, 정황이 심히 유리하다고 판단했기에 술에 취해가는 대공을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날이 밝아오자, 반란군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일부러 황성까지의 거리를 조금 많이 남겨두고 자리를 잡았기에 예정된 공습일자에 맞추려면 빠른 이동이 필요했다.
행군 준비가 끝나자, 20만의 넘는 대군의 앞에 이번 반란군을 이끌고 있는 대공이 등장했다. 그는 전날 이어진 술잔과 고기의 연속회전으로 몹시 피곤해보였지만, 특유의 위엄있는 안광이 모든 것을 가려주었다.
"저 산을 넘으면 곧바로 황성이다. 지금까지의 고생을 한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형편없는 군대에 긴장하지 말고 맡은 바 최선을 다해 싸워주기를 바란다. 저런 애송이들 따위에게 우리들이 질 리가 없다. 황제의 목을 따버리는 그날까지 죽을 힘을 다해 싸우자!"
언제나 그렇듯, 절규하는 듯한 함성에 대공은 자신의 검을 높이 들어 이에 답했다.
대공이 자식처럼 아끼는 명마 '초르네팔라'의 상태가 이상했다. 산을 넘어가며 황성에 가까워질 때마다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이, 마치 황성을 향해 가는 것이 두려운 것처럼 보였다.
대공은 하는 수 없이 말에게 진정제를 조금 먹였다.
이 때, 루넬리아는 황성 근처의 숲속에서 일단의 무리와 행동을 같이하고 있었다. 그들과 별다른 말을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언제나 그렇듯 기분이 무척 좋아보였다.
"레디 오빠. 왜 여기 있는 언니 오빠들이 황성으로 가는 거죠? 그리고 숨어서 들어가려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아… 암컷, 넌 좀 다물고 있거라. 우리들이 지금 굉장히 화가 나 있거든. 자꾸 말 시키지 말했으면 좋겠다."
"칫. 황제 오빠는 … 지만 굉장히 다정했는데."
루넬리아는 아무도 그녀의 말상대가 되어 주지 않자, 혼자 궁시렁 대기 시작했다. 그럴 수록 그 수상한 무리들은 머릿속이 복잡해져 갔다. 레디라고 불리는 빨간 머리 일행의 리더가 명령을 내렸다.
"일단 비장의 무기로 최대한의 타격을 입힌다. 그놈들한테 직접적인 타격을 주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 어떻게든 성을 공격해서 황궁으로 잠입해야 한다."
레디의 명령이 떨어지자, 각자 적당한 장소에 몸을 숨기며 투명화 마법을 유지하고 있던 무리들이 순간적으로 굳게 닫힌 황성의 정문에 가 섰다. 그들이 엄청난 힘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여 역시… 하늘을 거스르는 힘!》"
"《온 땅이 분노하리라! 》"
"《가라, 드래곤 토네이도!》"
"《하하하. 드래곤, 드래곤 죽겠지!》"
그러나 그들은 단 한번의 공격도 성공시키지 못했다. 아무리 힘을 모아도 황성에 피해를 입힐 수 없었던 것이다. 모든 흉악한 마법들이 이펙트만 화려할뿐이지 전부 무효화되었다. 그들은 격노한 나머지 마지막 남은 체면을 벗어던졌다.
《권능으로 말하노니, 본모습으로 돌아가라!》
대공은 황성을 눈앞에 두고 여러 자잘한 문제가 있었지만 어찌됐든 드디어 야산의 정상을 넘었다. 그리고 보이는 넓은 내리막길과 저 끝의 황성.
대공이 검을 빼들었다.
"제국의 미래는 우리 손으로!"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말발굽 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끊임없이 내달리는 말과 사람의 함성이 그칠 줄을 몰랐다.
대공은 적절한 속도를 유지하며 직접 전투에 나설 생각을 했다.
그는 조금 덜 멀게 보이는 황성앞에 수십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어련히 비킬 거라는 생각을 하며 계속 달렸다. 하지만.
선두를 이끌며 말과 함께 힘차게 달리던 대공과, 정변을 이끈 귀족 대다수는, 황성 앞에 모여 있었지만 애써 무시했던 자들의 갑작스러운 변신으로 목숨을 잃었다. 제국을 호령하고, 나아가 세상을 주름잡으리라 일갈하던 이들이 거대한 드래곤의 몸에 깔려 잘게 다진 고깃덩어리로 변했다.
그러자 군대의 지휘계통이 혼란스러워지며 진군이 일시에 멈췄다. 아니,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 수가 수십에 이르는 다 자란 드래곤의 무리를 반란군 병사 전체가 보고 말았기 때문이다.
"킬킬킬킬킬킬. 드디어 됐어. 아주 그냥 절묘한 타이밍이네. 딱이야, 딱!"
황제는 '황실 직속 체납감시 특별위원회'의 위원들과 함께 황성의 성곽에 서 있었다. 위원들은 어처구니 없는 반란군의 결말에 웃음이 나오면서도, 황제의 소름끼치는 웃음이 못마땅했다.
"사실 더 재밌는 게 기다리고 있지. 모두들 잘 지켜보게나."
황제는 말을 마치고 참았던 웃음을 다시 터뜨렸다.
【 우워어. 이 더러운 황제놈. 어린 드래곤을 농락하여 그런 말도 안되는 협상을 벌이다니! 네놈을 용서할 수… 크롸아아아… 우에에엑!】
【로, 로드! 괜찮으십니까. 우와아아아아앙! 나는 인간이란 종 자체에 환멸을 느낀다. 《죽어…》 쿠웩!】
그렇게 두 마리 드래곤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이번엔 다른 드래곤 하나가 나섰다.
【황제 네 놈의 목적은 분명 체납 드래곤의 처분이 아니었느냐. 어찌 이런 불리한 협상을 한 것이냐. 차라리 납세 관련 부분을 손봤으면 말을 안 하지. 우워어어어어!】
글렌더스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성곽을 밟고 섰다.
"이런 멍청한 것들! 네놈들이 짝짓기나 하자고 레어를 비우니까 결국 이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았느냐. 어쩜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한 것이냐. 참을 수가 없도다!"
【인간 주제에 감히! 아니… 그대는 돌연변이 더스트드래곤! 쿠워어어어어어어어어…】
로드로 보이는 적색 초거대드래곤이 글렌더스의 일갈에 기절해버렸다. 글렌더스는 기가 차다는 듯 허리에 손을 짚었다.
"허허허. 몹시 만족스럽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위대하단 말야. 저 파충류들이 '드래곤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협의'에 걸려들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운도 좋았지. 저 멍청이들이 법에 대해선 무지했으니… 나는 최대의 이익을 뽑아냈을 뿐이지. 크하하하하하하."
10분을 넘게 숨도 쉬지 않고 웃던 황제가, 숨을 잠시 돌리고 이번엔 드래곤을 향한 조롱을 시작했다.
"뇌가 있으면 들어라 머저리들아, 그런 식으로 수천년을 공격해 봐. 그래봐야 네 놈들 자식까지는 제국민이고, 제국내의 드래곤과 인간은 서로를 해칠 수 없다.니들이 실컷 공격해 봐. 다른 건 몰라도, 나를 직접 공격하면 그 데미지가 고스란히 반사되는 거야. 파충류 언어든 뭐든 협의는 절대로 거스를 수 없느니라. 솔직히 네놈들이 이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세금을 냈겠어? 털난 양심에 손, 아니 발 얹고 맹세할 수 있어?"
드래곤들은 곧바로 그 뜻을 이해함과 동시에 곤혹스러웠다. 자신들의 자식 대까지 복수가 불가능 하다면, 아마 제국이 멸망하고 수천 년이 지나야 복수를 성공할 수 있을 것이었다. 정신을 다시 차리려던 로드는 다시금 혼수상태에 빠져버렸다. 모든 면에서 완패한 싸움이었다.
로드의 권리를 위임받은 한 드래곤이 철수 명령을 내렸다.
수십 마리에 달하던 드래곤들이 일제히 사라졌다.
사건이 대충 마무리 되자, 블랙잭은 미처 묻지 못했던 궁금증을 풀고자 황제에게 말했다.
"흠. 그러니까 황제 네가 귀족들 앞에서 말한 뜻은 그놈들 생각과 다르단 거지?"
황제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그래, 그래. 난 분명 특정한 장소에서 '너희'라고 했지, '너희 모든 귀족'이라곤 절대 말하지 않았다고."
"에라이! 나가 죽어라."
블랙잭의 갖은 욕설에 흥이 오른 황제는 역시나 온갖 비속어를 동원해 블랙잭을 농락했다.
"와아아아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황제오빠 멋지네요!"
루넬리아의 활기찬 목소리가 들리자, 황제와 그 위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황성 정문근처에서 루넬리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루넬리아양, 도대체 어디에 갔다 이제야 오십니까?"
"네. 사실은 차원이동을 끝내고 다시 돌아왔는데, 그만 엉뚱한 곳에 떨어져서 저기 저 괴물 분들하고 안면을 트게 됐어요. 겨우 동굴로 돌아갔더니 아무도 없어서 힘들겠다 생각했는데 괴물 언니오빠들 덕분에 편하게 이곳까지 왔네요."
루넬리아는 드래곤 무리에 대고 가볍게 '고마워요!' 라고 소리쳤다.
글렌더스, 모르간은 루넬리아가 벌인 일련의 사건을 지켜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모르간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루넬리아에게 말했다.
"저기… 그러니까… 루넬리아양, 어서 이곳으로 돌아오셔야죠."
하지만, 불행하게도 루넬리아가 모르간에게 보여줬던 겨울산의 지옥은 그의 꿈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뭐? 네놈이 감히 나를? 하하. 우습구나. 내 당장에 그 혓바닥을 뽑아주도록 하마. 기다려!"
모르간의 몸이 굳었다. 그는 갑자기 마법조차 쓸 수 없게 됐는지, 사색이 되어 주춤주춤 성벽을 뛰어넘으려 했다. 글렌더스가 이를 간신히 제지했다.
"루넬리아양, 대체 이놈이 무슨 잘못은 했기에 그러시는 거죠?"
이젠 블랙잭 조차 모르간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루넬리아는 곧바로 대답했다.
"당연한 거 아냐? 펜슬에 심 조차 없어. 저놈은 그나마 달려있기라도 한 황제보다도 못해. 단지 한 마리 고자일 뿐이라고!"
황제는 무릎을 꿇었고, 모르간 - 본명, 펜슬 데 모스킷 - 은 사타구니를 움켜쥐며 울먹였다.
에필로그.
루넬리아는 기분이 언제나 좋았지만, 오늘도 좋았다. 아니, 오늘은 특히 더더욱 기분 좋은 날이었다.
"후후. 던질게요. 끄아아아아아!"
루넬리아는 특유의 역동적인 투구동작으로 맞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마구를 던졌다.
한편, 그 공을 꼼짝없이 쳐야만 하는 모르간은 그저 이 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도하고 있었다. 모르간은 눈을 감고 방망이를 휘둘렀다. 애초부터 공을 멀리 날리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기분을 풀어줘야 한다는 일념으로 버티고 있었다.
루넬리아가 던진 공은, 모르간이 휘두른 방망이와 조금의 접점도 찾지 못하고 뒤의 벽을 뚫고 나아갔다. 몇 분이 지났지만, 공은 아직도 날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무시무시한 파공성이 아직 끊기지 않았다.
모르간은 다리의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날 저녁, 황제와 대마법사 모르간은 황궁 제 1대연회장에서 엄청난 인파를 초청한 연회를 열었다. 전에 글렌더스가 벌였던 연회와는 정반대로, 그곳엔 연령대가 다양한 남자들만이 있었다. 빼어난 미남도, 흉측한 추남도, 이곳에서는 다같은 동지였다. 사실은 모르간의 대공작성에서 벌어질 연회였지만, 황제의 특별한 배려로 장소가 옮겨진 것이었다.
황제와 언제나 함께 있는 흑인종 블랙잭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모르간은 연신 눈물이 흐르는지 자신의 손수건이 축축해진 것도 모르고 계속해서 눈물을 닦아내었다. 이미 그의 얼굴은 걸레로 닦은 듯 물방울이 이리저리 맺혀있었다.
황제는 모르간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연회의 축사를 시작했다.
"자, 형제들이여. 우리들은 이곳에서 하나다. 모두 환경이 다르고, 외모가 다를 지라도 우리는 같은 아픔을 안고 사는 동지이다.
자신들의 처지가 비관적이라 하여 움츠러들지 말고, 이렇듯 당당히 모여 우리들의 이토록 자랑스러운 모임을 널리 알려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우리들을 위한 길임은 분명하다.
첫날밤의 그 순간,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와중에도 그대들은 통한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고, 아니면 남몰래 하던 스스로를 위한 위로중에, 혹은 나이 지긋한 이웃집 부인의 능수능란한 손길에서 끝없는 절망을 느꼈을 것이다.
이땅에 정의가 살아 숨쉬지 않아 우리들의 처지가 이리 된 것이지만, 나는 그 부정의를 기필코 바로잡아 보일 것이다.
여자의 치맛자락에 침 흘릴 이 없고,
밤늦게 딴짓하다 늦게 잘 이 없고,
남들 다 하는 사랑고백에 밤새 고민할 필요 없으며,
사랑했다 헤어졌다고 남들을 해코지할 이유도 없다.
우리는 위대한 대마법사 모르간의 경우를 따라 강대한 마력을 손에 넣어, 천하를 주름잡는 거대 집단으로 거듭날 수 있음을 나는, 그리고 우리 모두는 확신한다.
신성한 솔로들의 맹세를 위해 우리의 잔을 높이 들자!"
황제의 축사가 끝남과 동시에 연회장에 모여있던 모든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황제를 위해, 대마법사를 위해, 그리고 우리 '제국 영원불멸 동정인 친우회'의 드높은 영광을 위하여 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