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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이다?

이번엔 그냥 어디 갔다온 후기다?

야자를 마치고 오면 11시 30분. 그 즈음의 나는 항상 컴퓨터에 앉아 남지도 않은 좌석표를 보면서 한숨짓고, 활성화 되지도 않은 '예매' 링크를 본능적으로 눌러대고 있었다. 아마. 그의 팬들 대부분이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글들이 쏟아지고, 저마다 절규, 안타까움, 분노, 의아함 등을 표출하고 있었다. 이 중에서 영광스럽게도 내 리플이 행사 기자단 일원의 기사에 실리기도 했다. 그래도 그 내용이 절망적인지라 그리 즐겁지는 않았다.


학점을 포기하고 예매에 성공한 사람, 6시간을 컴퓨터 앞에 앉아 무작정 클릭만 해댄 사람 정도나 겨우 티켓을 따낼 수 있었다고 한다. 허탈함의 극치였다.


하지만 난 절대로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다시볼 수 있을지 몰라서 정말 필사적이었다. 겨우 잠들기까지의 2시간 여의 시간 동안만.


시간이 지나자 슬슬 현장팬매분 얘기를 꺼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나도 거기에 동참에 죽어도 표를 구하고 말겠다는 결사의 의지를 보탰다. 보통 현장판매분으로 20% 정도를 남겨둔다기에 다들 그걸 믿고있었다.


아뿔싸. 한 이틀쯤 지났을까. 이 망할 주최측이 남았던 표를 평일에 팔아버렸다는 거다. 현장 판매분은 원래 10%로 잡고 있었다는 변명을 했지만, 무지 화가 났다. 첫 예매도 평일 오전에 잡혀있던 터라 굉장히 불쾌했었는데 이젠 추가 예매까지 평일에 실시했단다.



5월 29일을 무작정 기다리는것. 고3 시절을 보내고 있던 터라 피곤하고 그 일이 떠올라 마음도 무거웠다. 몇 달 전부터 설렜었는데...


다행히 고3의 시간이 참으로 빨리 돌아가 어느덧 D-2가 찾아왔다. 그 사이에 입대를 앞둔 한 사람이 총대를 메고 표를 구해보겠다는 의사를 피력했었다. 물론 나도 거기에 낄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부푼 마음을 안고 나머지 이틀을 기다리는 건 무척이나 힘들었다.


D-1 상영관 앞에서 철야를 한다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나도 거기에 낄까 고민했다. 어떤 분은 아예 텐트를 가지고 온다고까지 하셨다. 노트북, 텐트에 사람까지 여럿 끼면 정말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결국 늦은 시각이라 집을 나설 수는 없었다.


밤늦게까지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무얼 했는지.


2시 30분에 잠들었다.


눈을 떠보니 세상이 환했다. 언제 비가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날씨가 흐렸다. 좌절감에 몸을 부르를 떨었다. 표는 20장 뿐인데... 여기서 남산까지 도대체 얼마나 걸릴지...


날씨가 불안해서 우산을 챙기려고 했는데 우산이 보이지 않았다. 15분을 뒤져서 겨우 문틈 뒤에서 찾아내 집을 나서려니까 열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겨우 열쇠를 찾아 집을 나오니까 이번엔 가방 안에 넣어뒀다고 생각한 우산이 없었다. 걸음을 돌려 집으로 뛰어갔다. 너무너무너무 내가 한심했다. 그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죽어라 뛰어서 5분 만에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무의미한 시간을 흘려보내고, 나는 텅빈 명동역에 섰다.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어서 무섭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그 길이가 인상적인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왔다. 정확한 방위를 짚을 수 없어 무작정 4번 출구를 나와 앞으로 걸었다. 쭈욱 걷다보니 점점 시가지가 낡아졌다. 이에 비해 건너편 건물들은 정말 높아보였다. 그 땅값 비싼 곳에 세웠다는 우리은행 본사가 가까이서 보였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들어선 것 같았다. 다시 4번 출구를 향해 무작정 걸어갔다. 그 주위를 배회하면서 보니까 약도에서 설명하던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짙은 안개가 낀 날, 내가 올라가야할 그 언덕은 온통 안개에 가려져 있어서 그 끝이 잘 보이지 않았다. 대기는 축축했다. 낡은 호텔과 타일같은 벽돌로 쌓아올린 오래된 목욕탕, 왼쪽으로는 얘기만 들어본 남산의 식당들이 있었다.


분명 급한 상황일진대 걸음을 재촉할 수가 없었다. 죽을때 까지라도 담고 싶은 광경이었다.


미시령 휴게소에서 보았던 경이로운 안개비가 생각났다. 온통 뿌옇게 하얀 세상이 펼쳐져 있고, 거기에 나는 단절되어 홀로 남겨진 느낌. 다른 점이라면, 남산의 안개는 더 따뜻하고 포근했다는 것이다.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게 언덕을 다 올라왔다. 무심코 한 번 뒤를 돌아봤다. 세상 모든 곳에 안개가 머물러 있었다.


카페에서 마음에 들어 항상 듣던 나카무라 유리코의 - Rainy Field가 생각났다. 그 간드러지는 선율이 내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체념에 젖은 가슴이 이번엔 난데 없는 그리움과 외로움에 떨었다. 길을 지나가는 몇 안되는 사람들. 저 너머로 보이는...


그렇게 아무 말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입구 앞에서 '초속5센티미터+스크리닝 토크 현장 판매분 매진' 이란 공지를 들여다 봤다. 아홉 달을 손꼽아 기다렸던 내 기대가 천천히, 그리고 사뿐히 내려앉았다.


건물 앞에 마련되어 있는 의자에 앉았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니 말로만 듣던 노랑 병아리를 키우는 리라 초등학교가 보였다. 그리고 남산이, 남산 타워가 보였다. 멀리 떨어진 남한산성에서 바라볼 때와는 그 위압감이 달랐다.


이대로는 시간을 허비하기 싫었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두갈래길에서 잠시 망설였다. 나는 1번 출구로 가는 평탄한 비탈길을 선택했다. 안개가 많이 걷혀 있는 듯 보였다. 터덜터덜 발을 내딛으며 말없이 언덕을 내려갔다. 도중에 다섯 명쯤 되어보이는 사람들을 지나쳤다. 그들은 밝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12시를 조금 넘겨서 집에 도착했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그들을 기다리지 않고 그냥 갔다 온 후기를 남겼다. 조금 투정을 부렸다.





내 인생은 지각과의 투쟁이 반은 차지하는 것 같다. 언제나 늦고, 늦지 않기 위해 뛴다. 여유가 없는 삶이라 남을 향해 웃어줄 수도, 손잡아 주지도 못한다.


고3의 어느날, 대형 지각을 범하고 교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그 때의 담당은 내가 2학년때 수업을 들었던 일본어 선생님. 그냥 한번만 봐줄 테니 그냥 들어가라고 하셨다. 사람은 좋다던 선배들의 말이 생각났다.


사회에 나가서 지각하면 얼마나 손해보는 줄 아냐며 몇 마디 훈계를 하셨다. 나는 가슴 깊이 새겼다.


하지만 나는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지각과의 사투를 벌일 것 같다.










제목이 있긴 하지만 낯간지러워서 그냥 안썼다?



됐어. 수분보충은 몸을 무겁게할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