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툴바

강철팬티는 사각팬티를 입는다?

블로그 이미지
대마법사 강철팬티. 사랑은 엄마한테나 줘라.
by 강철팬티
  • 11,119Total hit
  • 1Today hit
  • 5Yesterday hit

Liebesleid

 

 

 

볕 잘 드는 날. 쨍쨍한 하늘이 너무 좋아 빨래를 널던 것을 멈췄다.

뿅 하고 나타날 적마다 더러워지는 아이들의 옷은 그 생애의 반을 건조대 위에서 보낼 것 같다. 실은 지금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던 아이들의 옷을 간신히 찾아 널고 있는 중이었는데…

 

볕이 너무 좋아, 하늘이 정말로 상쾌해서 그만, 아이들의 옷가지에 눈물방울을 적셔버렸다.

 

단지 볕이 좋고, 하늘이 맑게 갠 하루일뿐인데… 나는 못 말리는 남편이다.

 

그토록 듣던 잔소리를 그리워하며 하늘을 올려다 본다.

당신. 설마 지금 나보고 질질 짜지 말고 빨래나 널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아내와 보낸 시절이 행복했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글쎄. 서로에게 전하지 못한 사랑이 가득했는데, 그걸 채 열어보기도 전에 우린 살아선 건널 수 없는 죽음의 경계 앞에서 영원히 육신으로는 함께할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빛바랜 흑백 사진들 속에 끼어 든 컬러 사진 한 장 처럼 나는 그날의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슬퍼하고, 안타까워한다.

 

비가 내릴 날도 아니니까, 아이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다시 세탁을 해야겠다.

 

 

 

여전히 봄가을로 건조한 바람이 수시로 드나들던 집은 변함 없이 늙어간다. 10대라는 꼬리표를 붙이지 못한 아이들도, 수염을 너무 자주 깎아서 입가에 항상 반창고를 붙이고 다니는 나도 그대로.

 

그런데 아내가 신혼 첫 빨래를 해 보겠다며 사온 빨래 건조대는 없고, 대신 그 자리엔 제법 그늘이 고인, 훤칠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

 

 

 

어느날,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아내가 은행나무 묘목을 하나 사왔다. 넓은 마당에 변변한 나무 하나 없다는 게 이유였다. 나는 불편한 표정으로 말없이 나무를 심었고, 아내는 그런 나에게 툭 던지듯 말했다.

 

"나 없어서 심심하면 저거 보고 '사랑한다'고 말해. 그렇게 말하면서 뽀뽀까지 해주면 더 좋겠네."

그땐 어이가 없어서 웃어버렸다. 언제나 특이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민망하게 나무에 뽀뽀를 하라니.

 

그런데 기껏 심어둔 묘목이 자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토양 문제인가 싶어 지렁이도 몇 마리 구해다 땅속에 풀어놓고, 게 껍데기도 버리지 않고 모아 나무 근처에 뿌려두었지만 도무지 크질 않았다.

 

아내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전혀 무신경했다. 정작 아쉬워할 사람은 따로 있었건만.

 

 

1년이 지나고, 아내와 나는 슬슬 자라기 시작하면서 무한한 재롱을 피우는 쌍둥이를 어르고 달래느라 하루종일 고생에 시달렸다. 밥 달라고 같이 울고, 하나 다쳐서 울면 옆에 있던 다른 하나가 우는 식으로 자신들의 존재감을 마음껏 알려댔다. 사람이 나이를 먹을수록 성숙해진다는 말은 괜한 소리였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온갖 고생을 마다했던 시절이었다.

 

이런 생활이 두 달쯤 지속되던 즈음에, 무슨 이유에선지 점차 아내의 건강이 나빠졌다.

 

 

시작은 가벼운 어지러움 정도였다. 그런데 이 어지러움이 점점 심해지며, 나중에는 아내 스스로 '머리를 통째로 울릴 만큼 극심한 고통이 아닐까' 하고 말할 정도로 증세가 악화됐다. 그래도 화도 안 내고 투정 한 번 안 부리던 아내였다. 말만 그랬지 항상 웃음을 달고 살던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아내가 발작을 했다. 잠시 동안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상황이 수습되어 구급차를 부를 생각으로 전화를 거는데 아내가 그것을 거부했다. 자기가 죽어도 그것만은 안 된다며 끝까지 거부했다.

 

곧 죽을 것만 같던 아내가 다시 회복한 것은 첫 발작으로부터 한 달 뒤였다. 그 동안의 고통을 떨쳐버릴 심산으로 아내와 함께 이곳저곳을 신나게 여행했다. 날이 갈수록 더욱 좋아지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나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다시 그릴 수 있었다.

 

 

 

 

 

 

그리고 화창한 늦봄. 얼마 뒤면 장마라는 일기예보가 들렸다. 그렇지만 기상청은 그 날 하루만큼은 좋은 날씨가 될 것이라고 예보했다. 아내와 나는 밀린 빨래를 다 끝내버리기로 결심하고 마당을 분주하게 누볐다.

 

아내의 병간호와 갑작스럽게 다녀왔던 여행 이후로 집안은 많이 어수선해 보였다. 아내와 머리를 맞대고 빨래를 먼저 할까, 마당을 먼저 치울까 고민하다가 빨랫줄부터 다시 걸기로 했다.

 

한동안 많이 느슨해져 있던 줄을 다시 팽팽하게 당기고, 철봉을 단단하게 고정시켰다. 여기에 가지런히 이불과 옷가지를 널자 늦봄에 날려 오는 온풍이 빨래들 사이로 불어왔다.

 

아이들은 아내의 건강을 생각해서 제 할머니집에 맡겨놓았지만, 이만큼이나 건강해진 아내라면 그 말썽꾸러기들과도 잘 어울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후후. 오늘 해지기 전까지 청소 끝내고, 애들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자."

 

아내는 말없이 아직도 자라지 않는 은행나무에 손을 얹었다.

 

"당신 좋을 대로 해요."

 

말을 마치자마자 터져 나오는 웃음. 한 번 쯤은 자신도 진지한 표정을 짓고 싶었다나 뭐라나.

 

 

 

혈색도, 움직임도 많이 좋아진 아내지만, 그날은 조금 무리를 한 듯 오후 조금 늦게 와서 툇마루에 앉아 내게 '조금만 쉬고 싶어' 라고 부탁했다. 마당에 널어놓은 빨래들이 햇빛과 바람에 영글어 가고 있었다.

 

아내는 조용히 눈을 감고 앉아있는 듯 하더니, 그만 옆으로 툭 허물어져 조용한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어느덧 어린 은행나무에 석양이 걸리고, 나는 아내의 곁에 앉아 가만히 담장 너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당 어딘가에서 굴러다닐 나뭇잎 몇 장과, 우리 부부의 모습에 심술이 난 미풍만이 간드러지는 소음을 내며 내 귀를 건드렸다.

 

결국 아내의 낮잠으로 나머지 집안청소를 모두 떠맡게 되었지만, 그래도 모처럼 편안하게 잠든 아내의 모습을 보니 유치하기 짝이 없는 심리적 박탈감은 이내 사그라졌다. 아내의 손은 예전처럼 따뜻했다.

 

 

 

 

 

저녁은 늦게 찾아왔다. 보랏빛 하늘 구석에 샛별이 떠오른 것을 보고는, 말없이 아내를 흔들어 깨웠다. 아내는 개운한 표정으로 잠을 쫓았다.

 

"에잇. 당신 나한테 이러기야? 집안이 너무 깨끗하잖아."

 

"눈곱이나 떼세요. 나갈 준비하자. 애들 안 데리고 올 거야?"

 

아내의 볼이 부풀어 올랐다.

 

"알았어. 저녁 준비도 안 했으니 오늘은 꼼짝없이 외식이구나? 나쁜 남편. 분명 이걸 노렸을 거라고..."

 

"멋대로 생각하시고, 준비나 해서 나오시죠."

 

조금 오래 재워뒀더니 기력을 회복한 모양이었다.

 

 

 

 

밤이 되어 잘 살펴볼 수는 없었지만, 분명 날씨는 심상치 않아보였다. 다른 계절이었으면 몰라도 여름의 초입엔 이런 궂은 날이 무난하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알 법한 일이다.

 

시시각각 진득한 어두움을 잊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빗방울이 떨어질 시점을 속으로 추측해보았다.

 

 

멍하니 고개를 들고 있던 중에, 바짓단 언저리에 까만 점이 드물게 생겨났다. 어느새 나타난 사나운 먹구름 떼는 너무 빨라 보기만 해도 가슴이 덜컹했다.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이 내 생각을 돌려놓았다.

 

 

"가자. 창문밖에 먹구름이 잔뜩 있는 거 보고 우산 꺼내왔어."

 

아내는 내게 우산을 건네주더니 익숙한 걸음으로 신발장에서 슬리퍼 두 짝을 꺼냈다.

 

"그 바지는 걷고, 이 슬리퍼 신고 나가자. 알겠지?"

 

"좋아. 오랜만에 기분 내서 한 번 나가보자."

 

과장된 목소리로 떨림을 지우려했으나, 목소리 자체가 불안정했다.

 

 

 

 

 

 

대문을 열어젖혔다. 이미 바깥세상은 묵직한 천둥소리와 정신 없는 빗소리에 제 빛깔을 잃어가고 있었다.

 

아내와 팔짱을 끼고, 하나밖에 없는 커다란 우산 속에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늦은 시각이 아님에도 세상은 두려움에 짓눌려 모든 것이 다 까맣게 타들어갔다. 아내의 숨결이 닿자 내 몸이 조용히 떨렸다.

 

당신, 비가 무섭다고 했지?

 

아내의 입을 바라보는 것으로 겨우 그 뜻을 알 수 있을 정도. 이제껏 회피해왔던 두려움은 내게 전혀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다가와 내 모든 감정을 흔들어놓았다.

 

아내는 팔짱을 낀 상태에서 내게 더 밀착해 왔다.

 

"후훗. 애들한테 부끄럽지도 않아?"

 

살짝 열이 올랐다. 그 장난꾸러기들이 내 이런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을까. 미적거리던 몸이 조금씩 기운을 되찾았다. 그러나 겨우 입술을 들썩거리며 더듬더듬 걷는 수준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애들 친가가 있다. 때 아닌 부끄러움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마음이 진정되어 걷기에는 더 좋았다.

 

 

 

 

 

 

 

 

 

 

아이들은 갑자기 나타난 엄마 아빠 얼굴을 보더니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쳇. 할머니, 할아버지 안녕히 계세요' 라는 인사를 끝으로 각자 아내와 내 손을 잡고 집으로 이끌었다.

 

솔직히 당황했다. 이 녀석들도 별 볼 일 없는 애들인데… 물론 내 자식이지만. 꿀밤을 먹여야 하나 머리를 있는 힘껏 헝클어 줘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다 아이들 나름대로 엄마 없는 일상을 버틴 하나의 방식이라고 생각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파트를 내려오면서, 아이들의 이야기는 그칠 줄을 몰랐다. 놀이공원에서 즐겁게 놀다가 길을 잃어서 그냥 가지고 있던 차비를 써서 할머니댁으로 돌아왔는데, 저녁 늦게 할머니 할아버지가 뒤늦게 돌아와 눈물을 뿌리며 사정없이 자기들 볼을 꼬집었다는 이야기나, 놀이터에서 어떤 수상한 대머리아저씨가 최신형 게임기로 자신들을 유혹해서 따라갔더니 자꾸만 귀찮게 해서 화장실로 가는 척하며 근처 파출소에 신고해버린 이야기는 정말 놀라웠다. 아내는 그저 킥킥거리며 아이들을 자기 품속으로 끌어들여 한 번 포근하게 안아주는 것으로 하고 싶은 말을 대신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밖을 바라보았지만, 비는 여전히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가방에서 우비와 장화, 우산을 꺼냈다. 아내는 아이들을 이리 저리 간지럽히며 우비를 빌려달라고 요청했고, 아이들은 엄마의 '오늘 뭐 먹고 싶니?' 라는 유혹에 잠시 혹했으나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깨우고는 우산을 펴고 빗속으로 달려갔다. 아내는 혀를 끌끌 차며 나와 다시 팔짱 끼고 아이들을 뒤 따라갔다.

 

날씨가 너무 좋지 않았기에 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고깃집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아이들은 채식주의자인 할머니 할아버지 밑에서 유일하게 만족하지 못했던 육식을 마음껏 즐기고는 ,계산대에 정신이 팔린 나와 아내의 눈치를 살피며 박하사탕을 두 손 가득히 움켜쥐고 장화를 신었다. 물론 아내의 눈치로 많은 양을 되돌려 놓을 수밖에 없었지만.

 

 

 

 

 

무지막지한 빗줄기 사이로 무사히 집에 도착하자, 그동안의 긴장이 다 가신듯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뭔가 잊은 듯도 했으나, 떨쳐내지 못했던 트라우마 하나를 이겨냈다는 생각에 그저 뿌듯했다.

 

아내는 아이들과 끊임없이 재잘거리며 욕실로 들어갔고, 나는 슬슬 차기작 준비에 착수해야만 하는 내 처지를 자각하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온몸에서 열기를 뿜어내는 아이들과, 멋들어지게 머리를 틀어 올린 아내가 내 뒤에 멈춰 섰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수건과 옷가지를 챙기러 방을 나섰다.

 

 

오늘은 분명 의미 있는 날이다. 더없이 행복한… 그런 날이다.

서늘하던 마음은 따스하다.

그래도 내 생각은 뭔가를 찾고 있다.

잊어버린 것이 있을까?

 

욕조에 몸을 담갔다가 빼며 생각한다.

 

 

 

 

번쩍 하는 빛과 함께 내리 떨어지는 천둥소리. 목욕을 끝내고 마루를 가로질러 서재로 가는 내게 산뜻한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그 덕분에, 평소에는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 그 초라한 은행나무를 바라보게 되었다.

 

모처럼의 갈증을 해결하고, 드디어 성장을 향한 날개를 펴지 않을까 기대하며 땅속 어딘가에서 숨죽이고 때를 기다리고 있을 나무의 터를 바라보았다.

 

비가 퍼붓고, 그 밑에 뿌리가 자리잡은 탓인지 나무 주변의 한 쪽 땅은 이리 저리 굴곡 있게 파헤쳐진 것처럼 보였다.

 

 

 

 

 

 

평소 같았으면 여기에서 고개를 돌렸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윽고 번쩍 하는 사이에 세상은 빛에 휩싸였고, 나는 그동안 내린 비로 인해 물기를 잔뜩 머금은 빨래들을 지켜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두 번의 천둥소리.

 

가슴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여리디 여리지만 내 심장을 쿵쾅 하며 꽉 죄어버릴 비명소리가 나란히 들렸다.

 

 

정신없이. 휘청거리는 시야는 안중에도 없이, 멀지 않은 서재로 향했다.

 

 

쌍둥이들은 모든 표정을 지워버린 채로, 온몸이 긴장된 것이 뻔히 보일 만큼 애처롭게 떨며 엄마를 불렀다.

 

이미 떠나버린 그 천둥소리. 그것이 예고에 불과했던 것일까

 

 

불러도 대답 없는 아내를, 아이들은 멍한 상태로 엄마를 깨우고, 나는…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울부짖으며 마당으로 달려갔다.

 

 

마무리 짓지 못했던 것. 눈앞에 있는 불안, 동시에 위험.

 

별 것 아닌 젖은 빨래를 보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휘청거려 가만히 서있기조차 힘들었다. 내 바지주머니에 휴대전화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내 손은 그것을 붙잡기는 커녕 장마가 쏟아지는 마당 한가운데에 서서 빨래를 걷고 있었다.

 

 

 

 

 

아내의 손. 그 손에 온기가 있었던가. 그 온기는 어떤 느낌이었지.

 

아내가 그렇게 쓰러져 버렸지만, 나는 얼굴은 커녕 같은 공간에 머물 수도 없었다. 아이들과는 또다시 기약 없는 이별을 하게 되었다.

 

 

중환자실 앞에서 서성이는 시간보다 담당 의사의 얼굴을 보기 위해 병원 전체를 쏘다니는 시간이 더 많았고, 그보다 집에서 툇마루에 걸터앉아 고개만 들어올린 채로 하루를 보낼 때가 훨씬 더 많았다. 병원의 어느 누구도 나를 피하기만 하는 것 같았다. 믿고 의지할 사람을 찾는 것조차 사치였다.

 

바닥에 너부러진 빨래는 그 때 그 모습 그대로 남아 나를 더욱 괴롭혔다. 고개를 내리는 것조차 두렵고, 내 성의 없는 눈알은 곧 죄악이었다.

 

 

 

 

 

 

 

 

여름의 열기가 서서히 식어가며, 아침저녁으로는 비 냄새가 상쾌했다. 익숙한 하루 일과처럼, 밤늦게 병원 중환자실 앞을 지켰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로, 나는 병실 안으로 들어갈 수조차 없는 보호자였다. 얼굴을 잊을 것만 같다는 나의 애원에도 그들은 눈 하나 깜빡 안 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다시. 평범한 하루 일과로 돌아와서, 병원 의자에 앉아 아내가 나오는 꿈을 꾸기를 간절이 소망하며 눈을 감았다. 오전 1시가 훌쩍 넘어간 시간에, 응급실 말고는 형광등이 켜진 곳은 찾기 힘들었다. 새벽을 보낼 자리를 찾아 아무데서나 앉고, 그녀와 같은 공간에서 그 얼굴이라도 지켜보고 싶다는 기도로 아침을 맞이하는 계획은 지극히 평범했다. 쉼 없이 돌아가던 병원 로비가 불을 끄고 휴식에 들어갔지만, 내겐 이 덧없는 밤이 무엇보다 소중한 일이었다.

 

갖은 사연을 안고 있는 병원에서 나 같은 사람은 흔히 볼 수 있었던지, 병원 수위는 처음 며칠간의 떨떠름함을 벗고 그 뒤로는 순찰중에 나를 발견할 때마다 위로의 한 마디를 건네주었다. 그 누구도 지나다니지 않을 시간에 이곳에 앉아있는 나를 보면 자못 위로가 된다면서… 속이 상할 만도 한 말이었지만,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진정되는 느낌을 받았다.

 

 

 

 

 

 

 

 

늦가을에 몰아치는 태풍에 병원 입구는 쉴 새 없이 바람이 드나들어 위협적인 소리를 토해냈다. 미세한 떨림이 지속되었고, 폭풍우는 그저 검게만 보이는 세상에 난폭함을 더했다.

 

 

 

 

그 날만큼은 그 수위를 만날 수 없었다. 하다못해 순찰용 손전등 불빛이라도 보일 법도 했는데, 그 빛조차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느낄 수 없었지만 그가 매일 건네주던 음료 한 잔이 못 견디게 그리워졌다. 그러나 그것보다 먼저 눈꺼풀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녹색 비상등 불빛이 점차 시야에서 잊혀지며 눈을 감으려는 순간, 바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모든 알고 있는 연락처를 수신거부하고, 오직 단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가지고 다닌 것이었다.

 

“중환자실입니다. 들어오시죠.”

 

 

운명의 때가 왔다고만 생각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너무 빨리 가 버릴까 계단을 이용했고, 그마저도 무서운 나머지 한 칸, 한 칸, 지금 걷는 이 발걸음조차 아내에게 힘이 되기를 바랐다. 홀은 유령의 품속이 되어 나의 구두 굽 소리를 두려움으로 품었다.

 

몇 번이고 지나다녔던 이 길. 아내의 얼굴이라도, 하다못해 같은 공간에라도 머물 수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은 너무 많이 지났고, 나는 이토록 짧은 길을 걸으며 마음의 준비라는 것을 해야만 했다.

 

 

 

 

죽음은 어디에나, 너무도 가깝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 중환자실이란 공간은 그 부조리한 깨달음을 내게 강요하고 있었다.

 

가만히 고개를 들어 희미한 조명으로 밝혀진 병실을 둘러보았다. 저마다 죽음을 베고, 깔고, 그에 눌린 채로, 손을 뻗어 '나를 구원 하소서' 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동안 속으로 삭혀냈던 절망적인 외침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아내의 담당 의사는 아내의 병상 곁에 앉아 '오셨습니까' 라는 중얼거림으로 나를 맞았다.

 

그는 내가 익히 알고 있던 수위였다.

 

예정보다 조금 늦어졌지만, 여기…

 

금방이라도 떨어뜨릴 것만 같아 불안한 나머지 내 몸이 먼저 반응해 음료가 든 캔을 낚아채듯 받았다. 그가 무슨 이유로 나를 몰래 찾아다녔는지. 사실 아내 담당 의사의 얼굴과 이름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여기… 앉아 계시는 게 어떠신지요.

 

그렇게 하죠.

 

 

 

너무나 무거운 분위기가 숨 쉬는 것조차 힘겹게 했다. 그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는지 연신 한숨만 길게 내쉬고 있었다.

 

대화는 쉽사리 시작되지 않았다.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품에서 녹색 병과 종이컵 두 개를 꺼냈다. 그리고 내게 컵을 하나 건네며 거기에 술을 가득 따랐다.

 

"차라리. 의사를 진작 그만둘 걸 그랬습니다."

 

그는 행동으로 자신이 지닌 슬픔의 무게를 보여주겠다는 듯이, 내게 따르고 남은 술을 병째로 들이켰다. 그의 표정은 이미 눈물을 남김없이 흘려보내고, 아직도 남은 눈물에 힘겨워 하며 보다 격하게 찡그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의사는 사명감으로 한다고 누가 그랬던가요? 저는 그 사명감이란 것, 그걸 버리고 싶어도 버리지 못합니다.”

 

그는 울먹거렸다.

 

어떠한 말도 꺼내기가 무서웠습니다.

 

 

한 마디 말과, 용기 내어 고백하는 속삭임이 극명하게 엇갈렸다. 아마도 그는 속삭이며 했던 두 번째 말을 결코 내 앞에서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 왔으리라.

 

 

이 끝없는 무력감은 수십 년을 의사로 지내면서도 결코 익숙해 지지 않더군요.

 

그의 말은 한숨처럼 새어나왔다. 그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아무 근거도 없이, 나는 더 이상 그를 위로해 줄 수 없을 것임을 느꼈다.

 

그는 무릎을 꿇었다.

 

저도 당신처럼 지켜야 할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내 바짓단을 붙잡고 그동안 내게 보호자로서 들어야만 했을 아내의 병에 대해 말을 반복하며 매달렸다. 그가 마신 쓴 소주도 눈물이었나 싶었다.

 

 

 

 

"이제… 아내 분을 데리고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오늘 아침에 바로 퇴원시켜 드리겠습니다."

 

병상의 윗부분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던 나는 정말, 미치도록 피하고 싶었지만 결국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고개를 돌리고, 다 죽어가는 얼굴로 나를 외면하며 울고 있었다. 시야는 더욱 아찔해 졌고, 나는 휘청거리는 몸으로 그녀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 밤을 보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아내도, 나도 이 밤을 몸서리치도록 안타까워 하며 서로를 부둥켜안았을 뿐이라 기억나는 것이 딱히 없었다.

 

눈을 살며시 떠보니, 그날 밤을 울면서 지새웠던 의사는 보이지 않았다.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오고 갔지만, 특별한 언질이 있었는지 나를 당장에 쫓아내려 애쓰던 사람들은 오늘만큼은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다른 환자들을 돌보았다.

 

아내와 잠시 떨어져 있는 것조차 두려웠지만, 그래도 정리할 것이 있었기에 잠시 중환자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먼발치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지, 내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내 옆에 붙었다.

 

"미리 말은 해뒀습니다. 아내 분은 제가 지켜보고 있을 테니, 퇴원수속 마치고 돌아오십시오."

 

그는 홀연히 내가 지나온 곳으로 돌아갔다. 그의 조금씩 비틀거리는 뒷그림자를 흘끗 보고, 병원 로비로 걸음을 옮겼다.

 

 

퇴원수속을 밟는 도중에, 병원 전체에서 음악이 들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멍한 표정 그대로 어딘가에 있을 스피커로 시선을 돌렸다.

 

한 대의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흐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말없이 노래를 부르며, '이제 퇴원하셔도 좋습니다.' 라는 병원 직원의 말을 무시하게끔 하며 나를 중환자실로 이끌었다.

 

 

아내는 간호사들의 도움을 받아 나갈 채비를 마쳤고, 담당 의사는 나를 발견하자 말없이 손짓했다.

 

아내 역시 지난밤 마음의 준비를 끝냈던지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더욱 안쓰럽게 하지만, 살며시 웃으며 나를 반겼다.

 

누구도 말은 하지 않았다. 입조차 굳게 다문 채, 결연한 표정으로 중환자실을 나서는 우리를 여러 감정이 뒤섞인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병원 라디오방송이 고장이라도 났는지, 퇴원 수속을 밟을 때 들었던 음악이 계속되고 있었다. 나와 같이 아내를 부축하며 길을 재촉하는 늙은 의사를 보고는, 몇몇 직원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아내와 나, 그리고 백발이 성성한 늙은 의사가 말없이 걷는 모습을 보며 역시 눈짓과 동작으로만 자신들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는 병원을 빠져나오자 마자 보이는 택시 아내와 나를 태웠다. 내가 눈짓으로 묻자 그는 옆에 대기하고 있던 사람의 등을 툭툭 쳐서 보조석에 태웠다.

 

아내도, 나도 뒤를 쳐다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여지껏 참았던 말과 울음을 터뜨리며 통곡하는 소리는 들을 수가 있었다.

 

그는 올해로 매스를 내려놓는다고 말했다. 저 하염 없는 눈물도 내년이 되고, 내후년이 되면 점점 말라가겠지.

 

 

 

 

 

우리가 어디 사는지 특별한 말이 없어도, 운전기사는 능숙하게 길을 찾아 가고 있었다.

 

아내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내 어깨에 기댔다. 그 늦은 봄날의 포근한 숨소리와는 다르게 조금은 거칠고, 위태로웠다. 나는 애써 외면하고자 눈을 감았다. 아내는 야윈 손으로 내 손을 잡아주고, 참아내지 못한 내 눈물 한 줄기를 닦아냈다.

 

 

왠지 차가 멈춰있음을 느꼈을 때, 아내는 이미 나를 안고 등을 토닥거리며 나를 깨우고 있었다. 눈을 뜨자, 아내는 운전기사와 내 부축을 받으며 작고 오래된 LP 레코드 가게로 향했다.

 

아내가 수집해 오던 수많은 LP판을 떠올리는 동안, 아내는 말없이 꽤나 좋아보이는 축음기 하나를 구입했다. 가게 주인은 거동이 불편한 아내의 사정을 알아채고 스스로 문을 열어놓고서 아내가 구입한 전축을 들고 나가 아내와 내가 타고 온 승용차 앞에 섰다.

 

 

 

 

조금 시간이 지체됐지만 그리 늦지 않은 시각에 집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 운전기사는 문을 열고 나와 아내를 맞았으며, 승객이 모두 내리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 번의 인사를 끝으로 차를 몰고 저 멀리 사라졌다.

 

 

그는 일주일도 과분한 시간이라고 말했다. 그것도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른다는 전제를 단 것이었다. 속사포같이 터져 나오는 그의 설명을 나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전부 기억해 냈고,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자 모든 것이 엉켜버린 것 같아 속이 울렁거렸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시간조차 너무 짧아 아쉬웠다. 그래도 알 수 없는 병으로 엄마를 떠나보내야 하는 아이들을 생각해서 어머니께 전화를 드릴까도 했지만, 전화를 들고 번호를 누르려고 하자 아내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무슨 이유일까 묻고 싶었지만 아내는 고개를 숙이며 내 시선을 회피했다.

 

아내와 나를, 이 설움 속에서 끼고 도는 그 보칼리제는 아내의 어깨가 출렁거림으로 끝나가는 듯 했다.

 

 

 

 

홀로 몇 개월을 보낸 이 툇마루에서, 아내는 몇 시간이고 내 옆에 앉아 주위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미 내가 돕지 않고는 걸을 수도, 뭔가를 떠올릴 수도 없는 아내. 길지 않은 가을해가 저물어 가고, 나는 우리를 감싸는 침묵을 보내기 싫어, 아내를 다시 만난다면 많은 이야기를 원 없이 나누리라 다짐했던 생각을 모두 털어내었다.

 

세상이 완전히 암흑에 잠기고, 단지 먹다 남긴 죽 그릇이 달라진 풍경의 전부일 때, 내면을 울리고 사라지던 아내의 흐느낌이 내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내는 조금 흐릿하게 보이는 마당 한 켠의 은행나무를 시선에 두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도. 내가 아닌 것이 내 생명을 빼앗아 가고 있는 것 같아.

 

아내는 힘겹게, 또 다른 선율로 날 이끌어 갔다.

 

그렇게 쓰러지고 병원에서 눈을 뜨니 의사는 그저 미안하다고… 분명 신체기능은 현저히 떨어지고 있는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렇게 되는 것인지 자신도 도무지 알 수 없다고… 의학 저널을 뒤지고 뒤졌지만 모르겠대. 그래서 미안하다고만 말하며 눈물을 흘렸어.

 

나는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야. 내 몸은 병실에 누워있기 전부터, 어쩌면 태어난 그순간부터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을 거야.

 

나는 뭐지? 내가 뭐였지? 뭔가가 흔들려. 그게 뭐지? 뿌리부터 흔들리는 것 같아.

 

병상에서 눈을 감고 있을 때면 툇마루에서 고개를 높이 들고 있는 당신이 보였어.

 

아내는 힘겹게 손을 들더니 마당에 자리잡은 은행나무를 가리켰다. 주변 땅을 잠식해가며, 몰라보게 키가 커 있었다.

 

저녀석이 아닐까. 내게 물 이외의 다른 것은 먹지 못하게 하고, 햇빛 한 줌에 견딜 수 없이 행복하게 하는…

 

 

 

"지나가듯 소망했던 것이, 너무도 쉽게 이루어졌어."

 

아내는 나의 부축 없이 위태롭게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

 

내 입술엔 피가 흥건했다. 아내가 사라지자, 내 입술은 깨물며 참았던 아픔을 토해냈다.

 

그 며칠 뒤부터, 아내는 희미한 비명만 질렀다. 뭔가 아프다는데, 난 해줄 것이 전혀 없다.

그 어떤 약도, 처방도, 시술도 그 고통만은 조금도 덜 수 없다고 했다.

 

며칠 째 그런 고통 속에 살던 아내는, 다시 시야를 회복하며 내 이름을 불렀다.

 

다음날은 침대에서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아내를 위해 여닫이 문짝을 떼어내고 바깥 구경을 시켜주기로 했다. 몇 대째에 걸쳐 추억이 쌓여왔을 이 집에서 우리는 저마다 엄마나 할머니가 들려주었을 옛날이야기를 하나씩 꺼내며 시간을 보냈다.

 

어쩌면 이 평온함이 마지막이겠지. 아내는 자기 아이들의 사진을 보며 내게 ‘참 귀여운 애들이네. 당신 친구 애들인가?’ 하고 물었다.

 

그 평온함을 깨기 싫어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어느덧 밤은 찾아와, 아내의 얼굴에 흉흉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제 눈조차 뜨지 못하는 아내는 베개 밑을 손으로 더듬어 내게 LP판 하나를 건네주었다.

 

사실은 당신 들어보라고 예전에 사뒀던 거야. 왜 멀쩡한 집 놔두고 병원에서 잤어. 혹시라도 들어봤으면 얘기나 꺼내볼까 했었단 말야.

 

한눈에 봐도 오래된 것이 눈에 띄는 케이스에는 'Fritz Kreisler - Liebesfreud' 라고 적힌 아내의 손 글씨와 함께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어떤 신사의 얼굴이 인쇄되어 있었다. 클래식은 전혀 알지 못하는 나를 위한 작은 배려였다.

나를 보며 아내는 처연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아내의 숨이 간헐적으로 끊기기 시작했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네. 언제라도 '나'를 위해 '그' 노래를 틀어주지 않겠어?”

 

말을 마친 아내의 얼굴의 웃음기가 더욱 선명해지며, 끝까지 놓지 않았던 내 손을 살며시 풀어주었다.

 

 

 

 

 

 

 

 

밖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아이들 몰래 다시 세탁을 하고, 옷을 가지런히 널었다. 한두 살 먹어갈수록 점점 영악하리만치 똑똑해지는 아이들에게서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언제나 긴장을 놓쳐선 안 된다.

 

분주히 마당을 오가는 동안에도, 아내가 내게 선물했던 88년산 전축은 잘 돌아가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 크라이슬러라는 사람을 알게 되고, 나는 너무나 익숙한 이 멜로디를 끊임없이 사랑하게 됐다.

 

보다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나도 그 크라이슬러처럼 글을 쓴다. 오래된 LP 판에서는 조약한 음질로 인해 마치 비가 내리는 소리가 섞여 들리지만, 알 수 없는 포근함이 너무나 좋아서 수많은 유명 연주자들의 CD가 있어도 나는 결코 그것들을 사지 않았다.

 

몇 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사랑이라는 주제가 내 감정을 파고드는 것 같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해 하던 아이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젠 자기들끼리 집에 들어와서 먼저 저 앨범부터 들으며 논다. 가끔은 자기들도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다며 떼를 쓰지만, 이 귀여운 악마들의 성격을 잘 알기에 호응조차 하지 않는다.

 

생동하는 봄기운이 내 몸을 가득 채우니, 졸음이 쏟아진다. 잠시 쉬는 셈 치고 툇마루로 돌아가 앉았다. 아내의 빈자리를 메우려는 듯 은행나무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자라나고 있다. 자기들 키를 표시해 가며 경쟁하던 쌍둥이들은 몇 달 전부터 '게임이 안 된다.'며 아예 포기해버렸다. 아마도 자기들 꿈이 야오밍이라도 되는 것인가 했다. 사실 자기들 키의 몇 배가 되는 나무와 키로 경쟁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황당한 것이라, 말도 안 되는 아이들의 푸념을 들으며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조소를 참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러다 잠시 웃음이 새어나와 한동안은 관심법에 이은 쇠꼬챙이 연타를 피하느라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토요일 오후는 쌍둥이들 얼굴 보기가 가장 힘든 날이다. 아침 일찍 준비를 마치고 어딘가로 놀러 나가버렸으니 늦은 점심을 달라고 오후 늦게나 돼서 올 녀석들이다.

 

앉은 상태에서 기지개를 펴고,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는 은행나무의 앞에 다가갔다.

 

 

 

 

 

 

 

 

 

 

손으로 나무껍질을 쓰러내리자, 잊혀졌던 짧막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나 없어서 심심하면 저거 보고 '사랑한다'고 말해. 그렇게 말하면서 뽀뽀까지 해주면 더 좋겠네.

 

 

불현듯 또 하나의 장면이 연결됐다.

 

 

마당의 흙은 비에 젖어 울퉁불퉁 해질 만큼 부드럽지 않다. 거기다 나무 주변으로만… 그렇게 땅이 파헤쳐질 리가 없다.

 

내 두 손은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부터 그 땅을 파내고 있었다.

 

 

아내는 분명… '기쁨'을 위해 '슬픔'을 감추고, 자신의 낭만을 그 분신에 숨겨두고…

 

흙이 잔뜩 묻은 손 위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손으로 힘겹게 땅을 파내자, 사각형의 납작한 상자가 보였다. 흙을 털어내고, 가까이 대고 살펴보니 그것은 CD 케이스였다.

 

흙이 진득하게 묻어 있지만 한 번도 뜯지 않은 채 묻혀 있던 CD에는 어떠한 설명도 담겨있지 않았다. 다만 익숙한 신사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전축의 전원을 껐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서재에 있는 CD 플레이어와 이어폰을 챙겨왔다.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을 주의 깊게 감상하며,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당 한 켠에 자리 잡은 은행나무에 다가가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갖다 대고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로 '사랑해' 라고 말했다.

 

CD플레이어는 무슨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한 곡만 반복해서 재생했다.

 

 

한 번 쯤은 스쳐 지나가며 들었을 법한…

 

야속한 아내였지만, 반대로 밉지는 않았다.

 

 

 

 

 

 

걱정마요, 여보. 난 당신의 '슬픔'까지도 사랑할 수 있으니까.







































그동안은 미완성으로 남겨뒀지만, 이젠 바이바이.

이만큼 냅뒀으면 됐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0 AND COMMENT 0

How to Use it

제품 설명에 앞서, 저희 회사에 대한 애정으로 제품을 구매하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본 제품은 저희 회사의 독자적인 기술력으로 설계, 제작되어 완성된 프로토 타입의

제품입니다. 따라서 뒤이어 판매될 양산형 1세대 제품에 비해 안정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다시금 말씀드리며, 기꺼이 프로토 타입의 제품을 구매해 주신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중략)

마지막으로, 본 제품을 사용하시는데 주의의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1. 제품의 식사는 저희 회사에서 판매하는 전용 사료를 통해 해결해주시고 가급적

제품에 사람이 먹는 식사를 제공하지 마십시오. 수차례에 걸쳐 각각의 제품에 여러

종류의 음식물을 제공하는 테스트를 거쳤습니다만, 일부 제품군에서 특정 종류의 음식에

이상반응을 보이는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이 문제는 제품 전용 사료만을 식사로

제공할 경우, 전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2. 사용자 안전테스트는 저희 회사에서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자체 AI 검사 프로그램을

통해 진행하여, 99% 이상의 안전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용자의 안전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다른 유형의 행동에서는 사소한 오류와 제품이 갑자기 정지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반드시 저희 회사 고객센터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3. 본 제품은 가상현실 교육 시스템 등으로 약 10년 분량의 정신통제과정을 거쳤습니다.

따라서 철저하게 사용자를 따르고 복종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사용자가 제품에게

할 것으로 예상된 범위를 뛰어 넘는 명령이나 행위는 제품의 정신체계에 순간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1.

“어머, 벌써 도착했나봐. 세상에, 사용설명서도 다 못 읽었는데 벌써 와버렸네. 지연아 택배 받고 다음에 연락할게. 기대해~”

다래는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운에 운이 여러 번 겹친 끝에 얻은 기회라서 더욱 그랬다. 다래는 회사 측에서 배달 받는 그 순간까지도 대체 나만의 누군가가 생긴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마음도 정리하지 못했다.

다래는 자신의 지문을 인터폰 아래에 있는 인식기에 갖다 댔다. 여기에 배달원의 지문인식과 그의 인적사항 확인이 끝나면 다래의 승인 하에 문이 열리게 된다.

“빨라서 죄송합니다. 하하! 이다래씨가 프로토타입 예약 5차로 제품을 수령하시는데요, 이다래씨보다 먼저 제품을 받은 분들 반응이 하나같이 ‘뜨악’이어서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네요. 일단 서명 부탁드릴게요.”

배달원은 능글맞은 말투와는 다르게 인상이 다소 험악했다. 다래의 전자서명을 받아 낸 배달원은 다시 1층으로 내려가더니, 직원 세 명을 3더 데리고 왔다.

“사실 설치라고 할 것은 없는데요, 안전 문제 때문에 제품 개봉이 저희들 입회하에 진행되도록 법적으로 정해졌습니다. 제품 정상 가동까지는 대략 10분 정도 걸립니다. 딱히 위험하다거나 한 경우는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니 옆에서 지켜보고 계셔도 좋습니다.”

배달원의 설명대로, 그 10분 동안, 별다른 위험도, 설렐 만한 것도 없었다. 그냥 제품은 깨어났고, 그들은 제품 이곳저곳에 용도를 알 수 없는 것들을 붙이거나 어떤 검사도구를 꺼내어 짧게 제품 이상여부를 검사했다. 결과는 ‘이상없음’이었고, 다래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2.

「21세기가 반을 훌쩍 넘긴 이 시점에, 한반도를 떠들썩하게 했던 연쇄 성폭행 살인 용의자 김성태가 오늘 오전 검거됐습니다. 김성태는 검거 당시에도 170번째로 살인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데요, 자세한 소식…」

“에휴. 세상이 참 아이러니하지. 지금이 때가 어느 땐데 저런 미친놈들이 날뛴담. 안 그러니?”

“…”

“그래, 미안하다. 가끔 네가 말을 못하는 걸 잊어버릴 때가 있어.”

한가로운 주말 오전, 다래는 주중에 회사근무로 녹초가 된 몸으로 소파에 누워 있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팍에는 이제는 제품으로 불리진 않는, ‘김순쇠’가 꼭 안겨 있었다. 이런 모습은 김순쇠의 외모를 보며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포즈이다. 최소한 다래 보다 김순쇠가 키만 놓고 봤을 때 20센티 미터 이상은 더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말 없이 주인의 얼굴만을 올려다보고 있는 김순쇠다.

김순쇠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다래는 습관적으로 김순쇠에게 말을 걸었다.

“역시 서서 오줌 싸는 것들은 낳고 먹이고 키워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니까. 어려서는 치고 박고 싸우기만 하고, 커서는 더럽게 욕심들만 많아서는. 흥! 게, 게다가 요즘 남자들은 생식 능력도 별로라고 하고… 정자 은행이 생긴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뭐 어쨌든 간에, 난 우리 귀여운 순쇠나 데리고 놀래. 그치? 헤헤.”

순쇠는 들을 수는 있기에, 다래의 말이 끝나자 다시 다래의 가슴에 안겨 행복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다래는 웹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펫(Pet)을 자랑하기 바빴다. 자신과 같이 프로토 타입 테스터라는 행운을 잡은 이들과 서로 자신들의 펫을 촬영해서 갑론을박이 벌어질 때면, 다래의 마음은 흡족했다. 어느 면에서 봐도 순쇠는 순진하고, 착하며, 더구나 뽑기 운이 좋아서 그랬는지 A+급 미납이었다. 매번 신제품 스마트폰을 구할 때마다 겪었던 불운이 한 번에 만회됐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게다가 ‘배터리’는 얼마나 훌륭한지… 다래는 이제 현실의 남자 따위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다래는 순쇠에게서 다른 남자들에게서 받는 것과 같은 스트레스를 전혀 받지 않아도 되자 순쇠를 마음 대로 집 밖으로 대동했다. 다래의 친구들과 만나거나, 단둘이 쇼핑을 가거나, 심지어 업무상 미팅이 있을 때에서 든든한 보디가드처럼 순쇠를 데리고 다녔다. 하지만 다소 마찰이 생기는 부분도 있었다.

“아이고, 이 년아. 데려오라는 서방은 안 데려오고, 저걸 남자라고 데려 오냐. 응?”

“엄마! 모르는 소리 하지 말라고. 순쇠가 얼마나 튼실하고 착한 앤데. 정말 나밖에 모른다니까. 부부싸움이니 가정폭력이니 그런 거 걱정할 필요도 없어. 자, 봐바.”

다래는 엄마가 보는 앞에서 순쇠를 두고 잠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 다래 아버지가 복날에 개 잡을 때나 쓰던 야구방망이가 다래 손에 들려 있었다.

“엄마, 순쇠 정말 착하단 말이야. 죽어도 날 사랑한다니까. 보여줄게~”

다래는 야구방망이를 두 손으로 꽉 쥐더니, 방망이로 순쇠의 엉덩이와 몸 이곳 저곳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둔탁한 타격음이 수십 차례 반복되었고, 다래가 ‘순쇠야, 이제 됐어.’라고 말하자 순쇠는 잠시 헐떡거리더니, 다시금 다래의 곁에서 다래의 손가락을 핥았다.

“꼭 개처럼 보이겠지만, 내가 명령하면 일반 남자들처럼 행동할 수 있어. 지금은 나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러는 거고. 이게 바로 여자의 로망 아니겠어? 엄마도 양산형 1세대 제품 발매되면 하나 사볼래?”

“어휴. 내가 뭐라고 말하겠냐. 널 그렇게 키운 부모 잘못이지.”

엄마의 표정은 떨떠름 그 자체였다.

3.

다래는 실제로 순쇠와 혼인신고를 시도했었다. 하지만, 순쇠 같은 펫을 법적으로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는 관련 법률이 없는 관계로 당장에 혼인신고는 불가능했다. 그리고, 다래로서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안전 수명’ 얘기만 잔뜩 듣고 법원을 나오게 됐다.

양산형 펫 1세대는 프로토타입이 발매되고 1년 내에 대대적인 론칭 행사 등을 벌이며 출시될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양산형 1세대의 출시 소식은 알려지지 않았다.

프로토타입 펫이 출시 된 지 3년 되어서야, 양산형 펫 1세대가 사용자 안전테스트를 마치고, 곧 출시된다는 보도가 일제히 퍼졌다.

제조사는 양산형 펫 1세대 론칭 행사장에서, 제품 출시가 늦춰진 이유를 해명했다. 프로토타입 펫들로부터 많은 데이터를 확보하고, 안전 한계수명과 복종화율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많은 시간이 소요 되었다고 밝혔다.

다래는 순쇠와 몇 년을 함께 보내며 점차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다래는 순쇠를 사랑하고 아끼는 애완동물 같은 대상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순쇠에게 그동안 자신이 남자들에게 시키기 원했던 행동들을 마음껏 요구했다. 말만 못할 뿐이지, 다른 기능에서 뒤처지는 것이 없기에 순쇠는 다래의 오빠 역할도, 거짓 애인 역할도, 다래의 보디가드 역할도 실수 없이 깔끔하게 저리했으니 말이다.

매번 맡긴 역할을 잘 수행할 때마다 다래는 진심으로 순쇠에게 칭찬하였지만, 이후에 알게 모르게 순쇠를 대하는 행동이 달라지고 있었다.

“야, 김순쇠! 내가 저 옷 그냥 빨면 큰일 난다고 했어, 안 했어?”

결국 다래는 자신이 직장 생활에서 많은 남자 동료들, 상사들과 마주치며 겪는 스트레스를 모두 순쇠에게 풀어버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재미 삼아 자신의 직속 상사인 박 차장의 드레스코드 그대로 순쇠에게 입히고 투명 의자 정도의 장난으로 끝냈다. 하지만 포르노에 중독되면 더, 더 자극적인 것만을 찾게 되는 것처럼 다래의 장난은 재미 삼아 하던 것에서, 점차 순수한 분노, 원한, 남자에게 받은 상처를 투영하는 형식으로 나아갔다.

“이 개 같은 김 전무! 병신 같은 게, 네 딸 년 나이나 되는 부하직원 엉덩이나 만지고 놀면 좋든? 응?”

순쇠는 다래가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가하는 모욕적인 성희롱에 자꾸만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절대복종의 표시로 언제나 그런 일이 끝나면 다래에게 안겼지만, 가끔은 맥없이 쓰러져 잠들 때가 있게 된 것이다.

회사에서 성희롱을 당할 때면, 간신히 참고 집에 와서는 순쇠에게 성폭행을 가하는 식이었다. 세상이 이렇게 발전했건만, 다래는 안정적인 승진을 위해서 암암리에 벌어지는 성희롱을 참고 또 참았다.

폭언을 당하면 폭언을, 모욕을 당하면 모욕을 주며 다래가 보이던 순쇠에 대한 감정과 생각도 변해갔다.

인간식탁, 나체로 산책하기 등은 순쇠에게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사회적 논의 끝에 펫을 인간으로 간주하는 법률 개정안이 통과되었지만, 다래에게 이제 혼인신고는 아무런 관심 없는 주제가 되었다. 다래 입장에서, ‘장난감’과 결혼하는 것은 우스운 소리일 뿐이다.

4.

그러던 어느 날, 기어코 일이 터졌다.

여느 때처럼 다래는 출근을 앞두고 있었다. 자꾸만 몸이 늘어지는 월요일 아침, 다래는 아침운동삼아 집에서 복싱을 하고 있었다.

샌드백은 순쇠였다.

“하아, 하아. 자. 이번이 마지막 펀치야. ‘얼음’이라고 말했지? 그대로 맞는 거야!”

다래는 며칠 전부터 연습하던 어퍼컷을 처음으로 순쇠의 턱에 명중시켰다. 상당한 충격이 있었는지, 순쇠는 다운되었다.

다래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끝났어. 나 이제 출근 준비 할 테니까 너도 알아서 쉬어.”

그렇게 뒤를 돌아서 방으로 들어가려던 다래는 순쇠의 몸에 깔려버렸다.

“야, 지금 뭐하냐. 정신 차리고 일어나.”

명령투로 얘기했지만 듣지 않는다. 안간힘을 써서 빠져 나오려고 하지만 여자 힘으로는 순쇠의 무게를 이길 수 없었다.

“이 새끼가 미쳤나. 야, 너 진짜 죽을래? 병신새끼가 이제 주인도 못 알아봐?”

간신히 양 팔을 빼서 순쇠의 머리를 여러 번 때리지만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동안 아무런 움직임도 없던 순쇠의 눈빛이 변했다.

다래는 순쇠의 눈빛에 독기가 어렸던 적은 맹세컨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다래의 입장에서 믿기지 않았지만, 순쇠는 다래를 짓누른 상태에서 오른팔을 뒤로 빼더니, 그대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순쇠는 정신을 잃었다. 다래는 아무 것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자, 마룻바닥이 순쇠의 주먹에 파여 있었다.

5.

「……살인범 김성태의 신상이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는데요, 일부 목격자들이 김성태와 거의 동일하게 생긴 인물을 봤다는 제보가 몇 차레 있었습니다 ……」

「박종철 기자, 검찰이 김성태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바로 어제, 비공개로 열린 재판에서 원고 측 검사는 …… 170여 차례의 성폭행 살인범에게는 법정 최고형이 마땅하다며 …… 약 15년간 언급조차 되지 않았던 무기징역을 ……」

주변에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래는 역시 순쇠를 버릴 수가 없었다. 아직 양산형 1세대가 출시되지 않은 점도 있지만, 순쇠 아는 다른 누군가와 같이 보낸 다는 것이 껄그러웠기 때문이다.

‘고객님,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제품명 '김순쇠-A_0501'에 대해서 강력하게 재사용을 원하셔서 저희 기술력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를 다해서 재안전화 작업을 마쳤습니다. 제품에 대한 것은, 역시 방문 발송 해드리겠습니다.’

다래는 순쇠의 몸에서 하나 없어진 부분을 발견했다. 다래가 설명을 듣기로는 폭력성, 돌발적인 행동 억제를 위한 최선의 조치를 취했다고 했다.

다래는 그리 달갑지 않았다.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물리적 거세까지 시키는 건 좀 너무해.”

다시 돌아온 순쇠는 거세된 것을 제외하고는 외형상 변화가 없었다. 다만, 거세의 영향인지, 미세한 행동이나 절대복종시의 반응이 더욱 부드러워졌다. 처음에는 떨떠름한 기분이던 다래도 만족했다.

그러나, 다래의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못했다. 2주 정도가 지나자, 업무 스트레스는 다시금 고스란히 순쇠의 몫이 되었다.

다래는 오랜만에 칼퇴근을 하게 되어 기분 좋은 마음으로 샤워장에 들어갔다. 순쇠는 다래가 틀어 놓은 뉴스를 보며 멍하니 앉아있었다.

되지도 않는 노래까지 부르며 즐겁게 샤워 하던 다래는 샤워장 유리문으로 실루엣이 비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기분이 상해버린 다래는 습관적으로 문을 열어, 멀뚱히서있는 순쇠를 발로 차버렸다.

순쇠는 무방비상태로 바닥에 머리를 부딪혔다. 실내 전체에 꽝 하는 소리가 났던 만큼 충격이 컸으리라. 몇 분 간의 정적 끝에, 순쇠는 의식을 회복했다.

순쇠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일어섰다.

순간 다래는, 순쇠의 눈빛이 매우 낯이 익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다래가 알던 순쇠의 눈빛은 아니었다. 순쇠는 다래를 ‘먹잇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6.

경찰 조사 내내, 다래는 눈물만 보였다. 다래의 부모님까지 찾아왔지만 다래는 진정하지 못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다래의 정신상태에, 정신과 의사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병실을 나갔다.

「속보입니다. 지난 금요일, 한 20대 여성이 자신이 키우던 프로토타입 펫에게 성폭행을 당하여 그 충격으로 정신과 치료중이라고 합니다 ……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현재 시중에 막 출시된 1세대 펫까지 전수조사를 하여 유전자 복제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원인조사를 수행할 것을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

7.

「연쇄 성폭행 살인범 김성태의 얼굴이 공개되었습니다. 경찰은 고심 끝에 김성태의 신상을 공개하며, 이와 같은 연쇄살인 사건이 다시는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는 심정으로, 범죄 예방 목적으로 김성태의 신상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사문화되었던 성범죄자 신상공개가 다시 활성화……」

병실에서 뉴스를 보던 다래의 뺨에 눈물이 쉼 없이 흘렀다. 그리고는 오열했다.

너무나도, 아니 섬뜩할 정도로 낯이 익은 그 얼굴.

다래는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찾았다.

Finale.

「바로 방금 전 3개국 합동 조사위원회의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그 안전성에 대해 의심 받던 복제인간 펫의 유전자가, 복제 대상 인간의 유전적 특성을 상당 부분 그대로 받아들인 채로 프로토타입과, 1·2세대 애완형 펫에 적용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국민들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이로 인해 애완형 펫의 제조사는 전량 리콜 조치와 함께 대국민 사과문을……」

「네. 드디어,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연쇄 성폭행 살인범 김성태가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상고심에서, 대법원은 김성태에게 징역 10년을 확정했습니다. ……… 그리고 또다른 소식이 들어와 있는데요, 4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복제인간 애완형 펫 프로토타입이었던 ‘김순쇠’가 폐기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와 함께 안전성을 검증받지 못한 다른 모든 프로토·1·2세대 펫 역시 전량 폐기처분이 내려졌습니다. 정부당국에서도 기업과 국민의 이해관계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0 AND COMMENT 0
나는 그저 "여러분이 하고 싶은 과제에 대한 기획안을 내세요"라고 해서 두 가지를 냈을 뿐. 다만, 그 레포트를 언제까지 내라는 공지를 대전에서 군장학생 2차시험 보는 동안 못 들었다는 것 뿐. 그래서 지난 주 시험 끝나고 어이가 없어서 교수님께 질문했더니....

자기라 하라는 거 내라는 걸로 결정됐다는 얘기를 듣고,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렀을 뿐.

글을 쓰라면 쓰겠지만, 퀄러티는 보장할 수 없다는 게 문제.

A4 5장 분량이면 만만치 않다능.

SF 말고 과학기술의 현실화 어쩌구 한 과제 기획안은 쓰고 싶어도 쓸 시간이... 업ㅂ어.


어처구니없이 내일 모레까지 SF 쓰게 됐으니, 그거 완성하면 올리겠음.
 
근데 그게 가능합니까? 이게 옳습니까, 그릅니까?
모릅니다. 나는 몰라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0 AND COMMENT 0

ARTICLE CATEGORY

분류 전체보기 (54)
나 이제 11학번임 (3)
단편이다? (7)
자유주제 (9)
20kg짜리 (0)
허접찌끄레기 시 (1)
평범한 이야기 (2)

RECENT TRACKBACK

CALENDAR

«   2012/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